2010년 4월 23일

한 물리학자가 ‘아이폰 얼리어답터’로 들뜬 사연

이동통신 기기에 관한 한 언제나 시대에 한참 뒤쳐져 살던 내가 한 달쯤 전에 구입한 아이폰 때문에 얼떨결에 일약 “얼리어답터”의 반열에 올라 버렸다. 이미 세간에는 아이폰 열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였지만 아직도 식지 않은 열기 덕분인 듯했다.

대체로 둔감한 내게도 아이폰은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처음에는 외형적이고 기계적인 특성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나 자신과 한국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될 만큼 컸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아이폰에서 불편한 점도 많이 느꼈다. 예컨대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하는 휴대폰의 기본기능에 나는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할 것 같다. (요즘 인터넷에는 “아이폰은 전화기인데 전화 오면 짜증난다.”는 유머가 있다.) 게다가 애플사 제품들의 악명 높은 폐쇄성은 아이폰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그런 만큼 이 글이 특정사 제품에 대한 단순한 홍보나 반홍보가 아님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나는 아이폰이라는 이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 비친 한국사회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이폰에는 사용설명서가 없는 이유

아이폰은 공식적인 사용설명서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설명서 없이도 사용하는 데에 별 지장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폰의 편리함을 높이 평가한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사용자들에게서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계를 보면 앞면에 버튼이 하나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용자는 그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다. 그 이후 터치화면에 나오는 상황도 이런 패턴을 반복한다.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거나. 대개의 명령배열이 일차원적이어서 사용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덕분에 사용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집중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나는 전시회에서 겪은 적이 있다. 외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대체로 관람객의 동선은 거의 외길이다. 그래서 전시실로 들어선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대신 관람객은 전시물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런데 국내 전시회에서는 관람객의 동선이 엉키는 경우가 많다. 관람객에게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면 사람들은 고민에 빠진다. 어느 쪽으로 가야 모든 전시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관람할 수 있을 것인지를 관람객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휴대폰 개발자나 전시 기획자의 관점에 설 것인가 혹은 사용자나 관람객의 관점에 설 것인가, 여기서부터 결과의 큰 차이가 시작된다.

불행하게도 전자의 마인드는 휴대폰이나 전시회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아직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 구성원인 국민들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방송에는 ‘기부천사’로 유명한 연예인 부부가 등장하는 공익광고가 있다. 주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서는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당신은?”

사회적인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일차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은 국가이다. (아니, 그러기 위해서 만든 2차 집단이 국가가 아니던가.) 이 광고는 “그럼, 당신은?”하는 물음에 멋쩍고 민망해 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교차하며 끝난다. 기부문화를 확산하자는 취지는 좋지만, 나라가 해야 할 일을 사회 구성원에게 떠넘기고 오히려 그렇게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드는 건, 적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다. 휴대폰 개발자나 전시 기획자가 마인드를 바꾸면 사용자나 관람객이 편해지듯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인드가 바뀌면 국민들이 편해진다.




아이폰이 폭로한 거짓들

그러나 아이폰이 한국사회에 던진 실제 충격은 기계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한 손에 들어가는 이 조그만 기계가 보급되면서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 속에서 살아 왔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먼저, 대기업이 성장해야 국민경제가 살아난다는 명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높은 통신비와 무선 데이터 이용요금을 지불해 왔다. 이 때문에 국내 굴지의 통신사들은 땅 짚고 헤엄치듯이 천문학적인 이익을 챙겼다. 그 결과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얼마나 많이 나아졌을까? 오히려 비싼 통신비에 허덕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무선랜이 터지는 곳이면 무제한으로 자유롭게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기계의 등장으로 우리는 왜 지금까지 비싼 요금을 지불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국내 소비자들이 차별대우 받는 현실에 우리는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대기업이 성공하면, 대기업만 배부를 뿐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대기업의 성공이 서민경제에 큰 이익이 되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반대로 아이폰을 만든 애플사는 앱 스토어를 통해 응용 프로그램 개발자에게 70%의 이익을 안겨준다. 대기업이 크게 이익을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장이 잘 굴러갈 수 있음이 증명된 셈이다.

둘째,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시대적 대세라는 주장도 허구임이 드러났다. 김영삼 정부가 국제화/세계화를 외친 이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근 20년 동안 한국의 살길은 세계화였고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호무역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던 한국에서는 스마트폰 시장을 2년이나 걸어 잠그고 있었다. (정보통신업계 종사자들에게 2년은 천문학적인 시간이라고 한다.) 그것도 대외적으로 국민 경제를 위해서라든지 하는 명시적인 이유도 없었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식의 막연한 말은 결국 국내 일부 대기업들의 이익만을 위한 조치였다. 일반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무선통신 서비스를 억지로 묶어 두고 거기서 막대한 이득을 하루라도 더 뽑아내려면 그만큼 새로운 기기의 도입을 늦출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국민 경제와 해당분야 종사자들과 직결된 통상문제는 모두 개방하면서 대세라고 하던 분들이 유독 스마트폰만큼은 몇몇 대기업을 위해서 대원군 못지 않은 쇄국정책을 펴 온 것이다.

셋째, 시장에 의한 공정경쟁의 룰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려 2년 동안이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그 사이 한국의 정보통신분야 국가 경쟁력은 추락을 거듭했다.

인터넷이 사방팔방으로 깔려 있고 언론의 자유가 만개했다는 2010년의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리는 왜 이 조그만 기계 하나가 들어올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았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정부와 기업들로부터 철저하게 속아 왔다는 것이다. 내가 주변에서 만나는 이른바 ‘배울 만큼 배운 전문가’ 분들은 오늘날 같은 대명천지에 어떻게 모든 국민을 속일 수가 있느냐, 혹은 국민들을 어떻게 세뇌시킬 수 있느냐고 항변하지만, 아이폰이 몰고 온 이 어이없는 상황은 세뇌와 속임수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언론도 큰 몫을 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정보혁명이 일어나는 21세기, 오히려 누군가가 언론과 통신을 송두리째 장악해 버린다면 그만큼 세뇌와 속임수가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른다. (내가 쓴 관련 글: ‘선덕여왕’을 보며 떠올린 ‘오늘의 과학과 정치’)





새로운 규칙

이와 함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아이폰이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냈다는 점이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의 대표주자일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이상의 그 무엇, ‘그냥 아이폰’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즉, 아이폰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전혀 없던 기계다. 앱 스토어 같은 공간을 만들어 전 세계 수많은 개발자가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게 여백을 남겨 둔 것도 여태 본 적이 없던 체제다.

스스로 기존의 틀을 깨고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엇을 만들려는 노력은 한국에서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의 재벌이 발전해 온 방식은 남들이 만든 시장이 돈이 될 것인가를 판단한 뒤 신속한 물량공세로 시장을 잠식해 가는 식이다. 물론 이런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식으로는 결코 새로운 시장을 만들 수는 없다는 점이다. 또한 남들이 만든 규칙에 안주하게 되면 세계적인 표준화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도 어렵다.

힘센 사람들이 만든 규칙에 순응하는 것은 어쩌면 한국 같은 약소국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운명은 결국에는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남이 만든 체제에 안주하는 우리의 모습은 최근에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전시작전권 문제를 봐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군의 가장 큰 약점은 무슨무슨 무기체계가 부족하다거나 병력이 모자라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전작권 여부와 관계없이 한반도 방위에서 미국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워싱턴의 의지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군의 심각한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한반도 전구에 대한 전체적인 전략을 기획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며, 이를 연습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핵심 시스템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신동아 2009년 7월호)

이 점은 물론 전시에도 치명적이지만 지금 같은 평화시에도 타국에 대한 결정적인 외교적 압박 수단이 없다는 점에서 국제적 발언권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한국이 아무리 반도체나 초고속 인터넷 세계 1위라 한들, 아무리 아이폰에 들어가는 칩이나 메모리 등등을 국내 대기업이 제공한다고 한들, 이런 풍토 속에서는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제품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노벨상이 안 나오는 이유

물리학을 하다보면 ‘한국은 언제쯤 노벨상 받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게 된다. 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았는데, 아이폰이 등장하면서 그런 고민이 사라졌다. 아이폰이 던진 이 모든 화두를 과학계로 비춰 보면 한국에서 왜 아직 노벨과학상이 나오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노벨상을 위해서 연구하지 않는다. 다만 한 사회의 기초과학 수준을 재는 통속적인 척도 가운데 하나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먼저, 기초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오직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아직도 마련되지 못했다. 기초과학은 원래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정부가 돈 되는 분야만 지원하면 기초과학은 굶어죽는다. 돈이 되는 분야는 굳이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대기업들이 투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부의 할 일은, 사회 전체적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분야를 지원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에도 과학자의 입장에 서느냐 관료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아이폰과 쓰레기폰의 차이만큼이나 달라질 것이다. 과학자들이 과학 이외의 것들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할 수 있어야 세계적인 성과가 나온다.

둘째, 한국의 과학교육에서는 새로운 규칙과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초중고는 물론이고 대학이나 대학원에서도 우리는 “주어진 문제풀이”에만 길들여져 있다. 그러나 정작 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규칙을 세우는 일이다. 여기서는 답을 푸는 것보다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며, 그에 따른 “과제수행”에서 창의적인 결과가 나온다. 물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잘 알아야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 속에서만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질서를 찾아 그 틀을 깨고 나갈 수 없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전복과 혁명의 연속이다.

해마다 10월이면 주위에서 우리는 언제쯤 노벨과학상 받느냐는 질문을 하곤 한다. 언론에서도 아쉬운 김에 한국의 수상 유력자들을 앞다투어 보도한다. 하지만 실제 관련 분야 종사자들에게 수상 가능성을 직접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연구 성과의 근원적 뿌리는 외국 학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훌륭한 스마트폰을 내놓더라도 그저 아이폰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셋째, 획일적이고 소통이 막힌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나올 수 없다. 이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경쟁력을 키워서 헐리우드에 맞설 수 있고 한류 붐을 일으켰던 밑바탕에는 정권교체와 민주주의의 확장이 있었다. 이 덕분에 표현의 자유가 만개할 수 있었고 창의적인 상상력이 날개를 달았다. 만약 이런 분위기가 10여 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아마 한국의 과학계도 새로운 바람을 탈 수 있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 거짓과 위선이 판치고 힘 센 사람들의 논리만 일방적으로 유통되는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상상력을 꽃 피우기 어렵고 기초과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도 없다. 단순한 문제풀이는 과학 활동 과정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창조적인 스토리를 과학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한국의 연구실에는 상명하복의 유산이 남아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생산적인 토론과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




과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마지막으로, 기초과학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아이폰의 힘은 겉으로는 안 보이는 무수히 많은 앱 개발자들에게 있다. 이들이 아이폰을 매개로 서로 얼키고 설켜 있는 한 아이폰은 건재할 것이다. 같은 원리가 과학계에도 적용된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 물리학과 교수가 가장 많은 서울대의 경우 그 수가 50명이 채 안 된다. (연세대, 고려대나 카이스트 등은 30명 안팎이다.) 재작년 노벨물리학상을 배출한 나고야 대학은 55명 정도,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오사카대학도 50명이 넘고 도쿄대는 100명이 넘는다. 우리보다 인구가 적은 대만의 국립대만대학은 서울대와 비슷하다.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하버드만 해도 60명이 넘는 등 물리학과 교수 수가 100명이 넘는 대학이 꽤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인구나 경제력 등에 따른 비례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임계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은 아무리 많아도 100도가 되지 않으면 끓지 않는다. 기초과학이 자생력과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최소한으로 확보해야 할 학자들이 몇 명일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한국의 수준은 임계점 이하임이 분명하다.




‘한국의 아이폰’ 만들기 전에…

아이폰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자 일각에서는 한국의 아이폰을 만들자는 얘기들도 흘러나온다. 그러나 급할수록 둘러가라고, 아이폰이라는 괴물이 어떻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그 배경부터 찬찬히 돌아보는 여유도 가져야 한다. 결국에는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향상되어야 전체적인 가능성이 높아진다. 제2의 김연아가 태어나길 기다리는 것보다 곽민정 같은 선수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가꾸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로움으로 과학계를 한번 돌아봐 준다면, 세인들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는 노벨과학상도 머지않은 미래에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과학자와 기자가 만드는 뉴스와 비평 SCIENCE ONhttp://scienceon.hani.co.kr/blog/archives/4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