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7일

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

데브피아 - 마이크로소프트지에 게재된 기사



세월은 정말 빠르다. MS가 창업된 지도 거의 30년이 되어 간다. 필자는 가끔 MS의 초기 광고를 보면서 그 당시의 MS는 한국 시장에 MS-DOS가 아니라 MS-베이직과 MS-FORTRAN 그리고 COBOL을 팔려고 했던 회사였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MS의 첫 출발은 자신들이 만든 베이직으로 시작됐다. 초기에는 MS 자체의 운영체제라는 것은 없었으며 본격적인 운영체제를 구현할 만한 컴퓨터도 없었다. 그러나 MS는 퍼스널 컴퓨터, 개인들이 사용하는 작은 컴퓨터에 관심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미약한 성능이지만 자신의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컴퓨터의 역사에서 퍼스널 컴퓨터는 초기부터 대형이나 중형 컴퓨터들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독단적인 길을 걸어 왔다. 과거의 대형기기들이 커다란 회사나 연구용으로 팔리던 것에 비하면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들을 찾고 있었고 자신의 비즈니스에 컴퓨터를 써 보면 어떨까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컴퓨터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그 이전에 원보드 형태의 컴퓨터라는 기계광들을 위한 기종도 있었으나 그것은 오로지 간단한 프로그래밍을 위한 컴퓨터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낮은 생산성을 가졌다. 하지만 초기의 원보드들이 나오자마자 빠른 시간 내에 수없이 다양한 변종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으며, 곧 모니터와 키보드를 내장하게 되었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시대’
MS 나 다른 중요한 회사들이 1970년대 초반에 창업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미국의 문화코드는 1970년대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만큼 당시의 미국 사회는 2차 대전 후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젊은이들과 이민을 온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1960년대 말부터는 이들의 젊은 피가 사회문화를 주도했다. 1970년대는 젊은이들에 의한 문화가 그 이전과 그 이후를 확연하게 갈라놓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당시 질식할 것만 같은 사회 분위기에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들의 문화 판짜기가 바로 오늘날의 미국의 문화코드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반 빌 게이츠 이전에 미국에서 가장 돈이 많았던 사람 중 하나인 석유왕 폴 게티는 월간지 플레이보이에 자신의 컬럼을 연재하면서 당시의 갑갑한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그 당시 플레이보이라는 잡지는 그 시대의 기준으론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사진들과 함께 수준 높은 컬럼이나 글들을 많이 게재했었다. 컬럼에서 게티가 주장하기를 건강한 사회라는 것은 건전한 비판자, 하다못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더라도 반항적이고 주관적이며 비판적인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그 많던 비판자들이 19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탄압되고 실종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티에 의하면 남들과 똑같은 판에 박힌 삶은 안정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사회는 변하며 결국 이러한 모방적인 삶의 방식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그 요지였다.

폴 게티 자신은 당시의 기준에서 볼 때 이단적인 삶을 살았다. 게티 자신이 석유발굴 현장에 잡역부 겸 감독으로 뛰어들면서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의 길을 포기하고 당시로서는 벤처업계인 석유 산업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 사람이었다. 석유 산업은 게티의 생전에 이미 초기의 구멍가게 수준의 도박적인 굴착 사업에서 거대 산업으로 변했다. 게티는 성공적인 길은 남들과 같은 옷차림으로 길을 걷고는 저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걷고 행동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따라서 게티는 ‘달라져라’라는 말을 되풀이하곤 했다. 요즘은 ‘달라져라’라는 말 자체가 상업적인 의미와 함께 희미하게 진부한 표현이 되고 말았으나 정작 주관적으로 남과 다르게 사는 사람은 지금도 많지 않을 것이다.

스티븐 레비의 유명한 책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을 읽다보면 제1부에는 컴퓨터 문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해커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부터 사회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때가 바로 새로운 문화코드의 출발을 알리는 시기였다. 제2부에는 하드웨어 해커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들이 그 새로운 세대이며 PC 혁명을 주도했다. 이들 중 몇 명은 지금도 활동 중이다. 이를테면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PC 혁명이 시작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각종 언론자료에 나타나 혁명은 계속된다고 외치곤 한다. 얼마 전 뉴스위크에는 ‘PC 시대는 끝났는가’라는 글이 표제로 등장했는데 그 글은 공교롭게도 스티븐 레비가 작성한 것으로 전반부는 PC 산업의 성장이 둔해지는 이유와 사례들이, 후반부에는 레비가 빌 게이츠를 인터뷰하는 내용이 있었다.

8비트 시대, MS 베이직
인텔에서조차 시장성을 예측하지 못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컴퓨터 회사가 아니라 군수업체나 산업계로 팔려 나갔고 이들 중 일부 재고들이 실리콘 밸리의 전자광들을 자극하면서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가 거의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로부터 시작됐다. 인텔은 1974년 8비트 범용 컴퓨터인 8080을 출시했는데 사실상 8080은 사용하기 어려운 칩이었으나 그래도 범용 컴퓨터로 사용할 수는 있는 칩이었다. 이 칩은 74년 1월 ‘엘렉트로닉스’에 발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해에 MITS라는 회사가 돌아다니는 재고를 이용하여 알테어(altair - 알테어는 스타트랙에 나오는 행선지 별 이름이라고 한다)라는 이름의 조립키트로 만들었다. 이 컴퓨터가 파퓰러 엘렉트로닉스라는 잡지에 실리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알테어를 사고 싶어 했다. 조립은 사용자가 해야 했다. 이 키트를 만든 MITS는 공급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키보드가 아닌 2진 스위치 몇 개와 LED 몇 개가 인터페이스의 전부였으며 MITS가 물건을 아무리 늦게 배달하여도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에 이미 8080 이전의 8008 같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골똘히 생각하던 폴 앨런과 빌 게이츠는 8080이 나오자 이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며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작은 컴퓨터가 나왔다는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1974년 엘렉트로닉스 잡지를 보던 두 사람은 이 칩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해 가며 1년 동안 만져보지도 않은 이 칩에 대해 궁리했고 인텔 칩에 사용할 수 있는 BASIC(Beginner’s All-Purpose Symbolic Instruction Code : 1963년 다트마우스 대학의 John George Kemeny와 Tom Kurtzas에 의해 교육용 툴로 개발됐다. 베이직의 인터프리터는 상대적으로 구현하기 쉽다) 프로그램을 개발해 줄 수 있다고 다른 컴퓨터 회사들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1975 년 1월이 되자 파퓰러 엘렉트로닉스 잡지에 알테어가 실렸다. 폴 앨런은 잡지에서 이 키트를 보고 빌 게이츠에게 보여 주었으며 둘은 갑자기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빌 게이츠가 회고하기를 수천명이 이 키트를 보았을 터이고 사람들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파퓰러 엘렉트로닉스를 보고 이 커다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다급한 마음이 생긴 것이 MS의 창업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래서 다른 회사의 의뢰를 받아 개발을 하느니 차라리 직접 개발하여 팔아보기로 정한 두 사람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작은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종이와 연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교내에 있던 DEC의 미니컴퓨터를 이용하여 폴 앨런이 8080의 시뮬레이터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시뮬레이터 위에서 베이직이 수행됐다. 초기의 MS 베이직이 만들어지기까지 5주 가량이 걸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하루 종일 방안에 쳐박혀서 아주 간단한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어 냈다. 메모리 용량이 4KB인 MITS의 기계에서 수행되던 초기의 베이직은 코드를 줄이고 또 줄이는 이른바 코드 버밍(code bumming)이라는 나름대로의 용량 최소화 과정이 필요했다(젊은 시절의 빌 게이츠는 코드 버밍의 천재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알테어를 만드는 MITS가 있던 뉴멕시코 주의 알브퀘큐(Albuquerque)라는 이상한 이름의 도시로 달려가 직접 알테어에서 베이직을 구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너무 부족하여 사람들은 줄을 서서 시간대 별로 15분씩만 키보드를 만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상황으로 마이크로컴퓨터의 프로그래밍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해에 MS라는 이름의 작은 회사를 만들게 되었다. 이 베이직은 베이직의 발명자인 존 케메니가 지적한 오리지널 베이직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베이직 개발을 계속했고, 결국 나중에는 케메니의 우아한 베이직보다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MITS 베이직으로 알려진 초기의 베이직을 포함하여 두 사람은 다른 기종의 베이직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었다. 이들의 베이직 프로그램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호회를 통해 원본 종이테이프를 복사해 사용했다. 수적으로는 많은 MITS 베이직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이들은 MS의 요구대로 프로그램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해적판’을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또 컴퓨터 해커들의 관례로 보면 MS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시장이 채 열리기도 전에 MS는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이라는 글을 여러 곳에 발송했는데 그 내용은 더 많은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해적 행위를 중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저작권법은 나중에야 컴퓨터 프로그램에도 적용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MS는 MITS 베이직에 대한 판권을 소유하려 하는 MITS와의 소송으로 판권을 찾아왔다. MS의 첫 번째 제품부터 판권소송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초기부터의 이상은 모든 책상과 가정에 MS의 제품이 사용되는 컴퓨터를 보급하자는 나름대로 원대한 것이었는데 당시 사람들 눈에는 이들의 너무나 진지한 태도가 정말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다. 1977년이 되자 애플, 코모도어, 라디오 새크 같은 기업들이 퍼스널 컴퓨터 시장에 진입하고 MS는 이미 이 당시에 이들과 일괄 계약으로 자신들의 베이직을 시장에 보급하려고 했다. 당시에 베이직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아무런 애플리케이션이 없던 마이크로컴퓨터 시장에서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려면 베이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MS는 다른 회사들에 베이직을 공급하며 성장했다. 결국 대량으로 판매되는 기종들에 평판이 좋던 MS의 베이직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표준인 것처럼 베이직 언어 시장의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80년대가 되기 전의 시장 규모는 미약한 것이었다. 8비트의 시장과 16비트의 시장은 규모의 단위가 다르다. MS는 70년대 말부터 일본의 니시 가즈히코(아스키를 창업한다)와 손을 잡으면서 아시아 시장에서도 MS 베이직의 판권을 팔았다. MITS 시절 4KB 정도의 기억장치에서 16KB, 32KB 그리고 마지막에는 64KB 근처까지 메모리가 늘어났지만 당시의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애플리케이션 언어는 베이직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이직이 아니라면 어셈블리 언어로 개발해야 했다(파스칼이 중요한 언어로 등장한 것은 80년대의 UCSD Pascal이며 그 다음에는 볼랜드가 8비트부터 터보 파스칼 선풍을 일으켰다. C는 그보다는 늦게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16비트 시대가 되어서도 80년대 말까지 베이직은 매우 중요한 언어였다. 적어도 PC 세계에서는 그랬다.

운영체제
MS가 베이직만으로 성공적인 영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컴퓨터들이 너무나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운영체제라기 보다는 모니터 롬에 가까운 마이크로컴퓨터의 구조가 그러했다. 이 ROM은 컴퓨터의 부팅부터 화면에 글자를 띄우기까지 간단한 초기화를 한다. 디스크 드라이버가 없는 초창기의 애플 II 컴퓨터를 켜면 1~2초 만에 ‘삑’하는 소리와 함께 ‘Apple II’라는 글자가 나오고 바로 베이직 인터프리터가 나오는 구조였다. 사실상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띄우기 위한 펌웨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컴퓨터를 제어하는 번지수들은 64KB 주소공간 안에 있고 베이직 명령어 peek와 poke를 사용하여 무엇이든지 제어할 수 있는 너무 간단한 구조였다.

컴퓨터들이 외부의 데이터를 읽어와야 하는 경우 가장 초기의 기계들은 종이테이프에 구멍을 뚫어서 읽는 방식이었다. 작은 플로피 디스크의 10분의 1만 채우려 해도 종이테이프는 약 20피트 가량의 길이가 되곤 했으며 끊어지면 조심스럽게 이어 붙여야 하는 일을 되풀이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FSK(Frequency Shift Keying)를 이용한 방식으로 간단한 모뎀 같은 회로를 이용하여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카세트테이프 음성으로 저장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띄우려면 일반 카세트테이프의 이어폰 단자에 컴퓨터를 연결하고 팩스나 모뎀과 비슷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70년대 중반이 되자 거의 같은 성능의 기계에 플로피 디스크를 장착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 정도의 기계에서 운영체제를 논의하는 일이 우습기는 해도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나온 지 불과 3~4년 후에는 벌써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채택하는 기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만큼 진보가 빨랐다.

DOS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CP/M이라는 운영체제를 아는 독자는 아마 소수일 것이다. 이른바 DOS(Disk Operating System)라는 것은 70년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기술적 도전이었다. DOS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적어도 플로피 디스크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어야 했다. 하드디스크는 훨씬 더 뒤에 나온다. 요즘은 구별이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8인치 짜리의 플로피를 플로피 디스크(disk)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 나온 5.25인치와 3.5인치를 플로피 디스켓(diskette)이라고 불렀다. 디스크보다 작다는 뜻이다.

197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에는 회사들이 DOS를 고려할 때는 둘 중의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CP/M을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만의 DOS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애플은 애플 도스를, 다른 회사는 회사의 이름을 딴 자신들만의 DOS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시장에 일찌감치 진입한 CP/M이 있었다. CP/M 과 기타 운영체제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마땅할 산업계 표준인 CP/M은 신기하게도 다른 회사들이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 운영체제를 만든 사람은 게리 킬달로 일종의 천재이지만 결코 상업적일 수는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킬달은 한때 매우 성공적인 디지털 리서치(Digital Research Institute)의 창업자이자 사장이었다. 게리 킬달이 비즈니스적인 능력을 함께 발휘했다면 적어도 운영체제에서는 MS를 떨쳐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로그래머나 엔지니어로서는 매우 출중한 사람이었다. DRI와 MS는 한때 IBM의 운영체제가 되기 위해 경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IBM PC와 함께 시작된다. 1980년대 초 IBM이 돈 에스트리지의 지휘 하에 IBM PC를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개발 회사들을 타진하고 다닐 무렵 IBM은 PC를 만들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없었다. 하드웨어는 신생 회사라 못미덥기는 했으나 쉽게 주변 부속을 쓸 수 있는 인텔의 8088을 CPU로 선정하였으나 디스크를 장착하기로 해서 간단한 운영체제가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IBM은 일종의 DOS를 필요로 했다. IBM의 직원들은 몇 군데의 회사를 만나러 다녔으며 그 중에는 최종적으로 MS와 디지털 리서치가 남았다.

사실 두 회사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DRI의 CP/M은 이미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1973년 슈가트에서 인텔에 샘플로 8인치의 디스크 드라이브를 기증하자 그 전부터 인텔과 일해 왔던 킬달은 이 장치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개발장비 엔지니어이던 존 토로드와 함께 개발장비를 위한 디스크 컨트롤러를 만들었다. 디스크 제어기가 곧바로 만들어졌고 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이 제어기를 컨트롤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CP/M의 조상이 되었다.

CP/M은 PDP-10의 VMS 운영체제에서 명령어와 파일 이름을 구성하는 방법을 차용했다고 한다. 그의 제자였던 고든 유뱅크스는 원시적인 CP/M을 위한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만들었다. 킬달은 인텔과는 아주 친했고 인텔의 8008 시절부터 디버거와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왔으므로 MS보다 더 빠른 시기에 이미 운영체제와 베이직 인터프리터를 갖고 있었다. 1976년 이전의 초기 버전들은 공공시설인 해군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개돼 돌아다녔고 해군 연구소를 나온 후 곧 바로 토로드와 함께 DRI의 전신인 IDR(Intergalactic Digital Research)를 창립했다(Intergalactic은 은하계 간이라는 뜻이다).

회사가 창립되자마자 두 사람은 여러 마이크로컴퓨터 제조회사를 위해 디스크 제어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1976년 당시 대표적인 회사였던 MITS와 경쟁 회사였던 IMSAI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2만 5000달러에 DRI와 비독점적인 계약을 한다. 여러 회사가 CP/M을 원하고 있었으므로 킬달은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시 짜고 BIOS(BASIC Input/Output System)라는 이름의 기본적인 모듈만 바꾸면 다른 기종 간에도 자유롭게 CP/M을 이식할 수 있도록 전체 구성을 재설계했다. 그리고 에디터, 어셈블러 그리고 디버거와 다른 유틸리티를 첨가했다(이 전통은 그 다음의 DOS에서도 거의 비슷한 패키징이 들어가는 것으로 이어졌다).

완전한 마이크로프로세서 개발 시스템으로 탈바꿈한 CP/M은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회사 이름을 다시 Galactic Digital Research로 바꾸고 CP/M-80이라는 이름으로 90달러에 판매했다. 놀랄 만큼 많이 팔린 CP/M-80은 개인들뿐만 아니라 1977년이 되자 회사들까지 사용하기 시작했다. 회사들은 자신들의 BIOS를 만들고 이 바이오스는 CP/M을 성공적으로 로드하면 되었다. 킬달의 회사 이름은 다시 galactic을 빼고 Digital Research Institute로 변경되었다.

CP/M은 어찌 보면 시대를 뛰어넘은 설계라고 할 수 있다. 킬달은 나중에 회고하기를 CP/M의 성공은 확신할 수 없었으나 플로피 디스크의 성공은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이 되자 MS의 FORTRAN, UCSD Pascal, MicroPro의 WordStar, Ashton-Tate의 dBase를 포함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CP/M에 기반한 기계들 위에서 수행되고 있었다. 많은 기계들이 CP/M을 이식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CP/M은 Apple, Radio Shack, Commodore, Zenith, Sharp 같은 거의 모든 기종에서 동작했다. 기계의 성능은 카세트조차 없던 초기의 기계들과 비슷했으나 메모리를 늘리고 디스크 컨트롤러만 달면 CP/M을 이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MS도 CP/M에 관여하고 있었다. MS에서 개발된 소프트 카드라는 제품으로 이미 6502라는 다른 CPU를 사용하고 있던 애플에 카드를 꽂으면 Z80 CPU 기계로 바뀌고 당연히 애플에서도 CP/M을 즐길 수 있었다. 애플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소프트 카드는 대단한 히트 상품으로 변했다. 다른 기종의 CP/M의 카피 수와 비슷할 만큼 많은 양의 CP/M이 MS를 통해 팔려 나갔다. 영업 면으로는 대단한 수확이었으나 CP/M이 MS의 운영체제는 아니었다.

1980년에 IBM은 DRI와 접촉하여 8086 버전인 CP/M-86을 라이선스 받으려 하였으나 킬달은 이미 다른 언어들의 프로젝트에 바빠 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회사들도 CP/M-86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킬달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바빴다. 1979년 8086 기반의 컴퓨터 키트를 만들고 있던 시애틀 컴퓨터(Seattle Computer Products)는 CP/M-86을 기다리다 지쳐서 팀 패터슨이라는 프로그래머를 고용하여 운영체제를 만들고 패터슨은 이를 QDOS라고 불렀다. QDOS는 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급조한 DOS)의 약자로 CP/M의 기능조차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제품이었다고 한다. MS는 근처에 있던 시애틀 컴퓨터를 위해 베이직의 변형판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QDOS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16비트의 초입에서
IBM의 직원들이 DRI를 방문했을 때 킬달의 전처이자 DRI의 공동대표였던 도로시와 DRI 측의 변호사는 IBM의 비밀준수를 거부했다. IBM 측의 비밀유지 계약이 너무나 일방적으로 IBM 측에 유리한 조항이 많아서라는 이유였다. 아예 킬달은 회의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CP/M-86의 변경도 거절했으며 IBM이 제시한 것보다 더 높은 로열티를 요구했다. 협상은 결렬에 가까웠다.

MS 측에도 협상이 있었는데 게이츠는 베이직 때문에 IBM과 일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의 기회를 붙잡기로 했다. 당시의 상황은 아무래도 DRI 측이 유리했다. 빌 게이츠는 IBM에 DOS와 베이직 패키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더 유리한 가격 조건으로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곧바로 시애틀 컴퓨터의 SCP-DOS를 5만 달러에 라이선스하고 팀 패터슨을 고용하여 이 도스를 IBM PC에 맞추는 일을 시켰다. IBM은 그 이전에도 몇 번 PC의 개발을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MS로서는 상당한 모험이었다. 결국 언어의 개발과 유지보수만 해도 벅찬 인력을 가지고 있던 MS는 개발되어 있는 8비트 운영체제조차 없으면서 IBM 측에 걱정하지 말라고 일종의 블러핑을 한 후 QDOS를 가지고 MS-DOS를 만든 것이다. DRI에는 이미 CP/M-86은 거의 완성 상태였다.

IBM이 MS-DOS의 첫 번째 릴리즈를 테스트했을 때 300개가 넘는 버그를 찾아냈다고 한다. IBM도 급했기 때문에 디버깅과 개선을 도와주었고 매뉴얼까지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DRI는 DOS의 버전 1.0 이후에 CP/M-86을 발표했다. IBM은 CP/M-86과 DOS를 같이 발표했는데 MS-DOS는 60달러였고 CP/M-86은 240달러에 책정되었다. DOS 1.0이 아무래도 기능이 많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사용자들은 선뜻 돈을 더 내고 DRI의 제품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DRI는 CP/M을 카피(시스템 콜, 프로그램 구조, 유저 인터페이스)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MS를 제소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IBM을 제소하는 결과가 되며 길고 머나 먼 법적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결국 포기했다. MS는 운이 좋았다. 1982년이 되자 IBM 측이 MS에게 DOS의 하드디스크 버전을 요청했고 MS는 완전히 새로운 코드 재작성의 기회를 얻었다.

DOS 버전 2.0은 1.0과 완전히 다른 코드를 사용하게 되었고 DRI의 제소 기회는 사라졌다. MS-DOS의 성능도 점차 개선됐다. 결국 전세는 바뀌어 DRI는 CP/M-86을 개량하여 멀티태스킹과 멀티유저 기능을 추가한 버전을 내놓지만 이번에는 DOS와 100% 호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불과 2~3년 만에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나중인 1989년에는 DRI에서 DR-DOS를 만들어 MS-DOS와 완전히 호환되는 버전을 만들어 냈지만 MS의 마케팅 전술을 이겨내지 못했다. MS-DOS 버전 5.0과 6.0에 DR-DOS의 특징들을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MS-DOS가 과연 CP/M의 아성을 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많았다고 한다. CP/M에 깔려 있는 수많은 소프트웨어들과 그 사용자들이 과연 성능이 그렇게 우수하지도 않은 XT 기종으로 옮겨 갈 것인지도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CP/M은 그만큼 잘 설계된 운영체제였다. 개발자들 역시 기존의 CP/M을 포기할는지 의문스러운 상황이었다. CP/M은 고사하고 애플이나 다른 컴퓨터의 사용자들이 IBM PC를 선택할 지조차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예상보다 빠른 전환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분분하나 사람들이 IBM PC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좋은 애플리케이션들이 IBM PC에서도 나타났고 더욱이 10배 이상 커진 메모리 공간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한번 변화가 일어나자 사실상 산업계의 표준은 IBM 호환으로 바뀌었다.

게리 킬달과 CP/M
나름대로 커널과 운영체제에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8비트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운영체제인 CP/M에 대한 언급을 회피할 수 없다. 8비트 시절의 빈약한 하드웨어 위에 본격적인 운영체제를 만든 사람인 게리 킬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80년대의 PC 왕국은 어떠한 형태이건 CP/M과 킬달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그림자는 90년대에 윈도우가 나오면서 간신히 희석되기 시작했다(초기의 MS-DOS 버전의 시스템 콜과 CP/M의 시스템 콜 그리고 MSX-DOS의 시스템 콜은 정말 놀랄 만큼 흡사했다).

게리 킬달에 관한 글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컴퓨터 업계에서 회피할 수 없는 2가지의 커다란 대극, 그러니까 아카데미즘과 비즈니스라는 두 가지 측면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게리 킬달은 아카데미즘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급변하던 당시의 상황은 예상되었던 승부를 바꾸어 놓았다. 조금 더 느린 템포로 발전하고 있었다면 어떤 승부가 났을지 생각해보곤 한다. 때때로 필자는 가끔씩 프로그래밍하는 어떤 사람들의 성향은 빌 게이츠보다는 게리 킬달에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킬달의 성향은 일종의 전형적인 해커들의 성향과 유사했다.

DDJ(Doctor Dobb’s Journal)의 편집장이었던 M. Swaine은 게리 킬달에 관한 글에서 초기의 마이크로컴퓨터의 발전을 하나의 혁명으로 보았다. 초기의 분위기는 참여한 사람들의 연령을 고려하고 새로운 형태로 빠른 발전이 일어나는 분야임을 고려할 때 대학교처럼 정보가 자유롭게 공유되는 분위기가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과거의 것들을 붙잡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정보의 고유와 빠른 발전의 시너지가 대단한 발전의 핵심요소였다고 지적했다. 퍼스널 컴퓨터의 혁명은 진정한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MS와 애플은 본사를 캠퍼스라고 부르며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고도 지적했다. 하지만 가장 이런 분위기가 가장 충만했던 회사는 DRI였으며 대학교의 분위기 바로 그 자체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게리 킬달은 타고난 교사 스타일의 사람이었으며 비즈니스는 그에게 별로 걸맞는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킬달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은 1972년으로 대학 게시판에서 25달러짜리 마이크로컴퓨터의 광고를 우연히 본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인텔에서 만든 광고물 조각이었다. 1972년으로 봐서도 그것은 싼 가격이었다. 이 광고는 4004를 만든 테드 호프가 이 칩은 마이크로컴퓨터라고 부르는 것이 옳고 결국 엔지니어들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광고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호프는 마이크로컴퓨터의 장래를 낙관했다. 킬달은 25달러를 보내고 이 칩을 구입했다. 그 당시에 청바지에 티셔츠를 허접하게 입고 다니던 킬달은 누가 보아도 얼마 후 컴퓨터 업계에서 비중 있는 일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는 킬달이 영원히 컴퓨터나 가르치고 있을 사람으로 보았으며 또한 사실이었다. 킬달이 인텔의 칩으로 처음 만든 것은 아버지의 부탁으로 항해용 삼각계산을 하기 위한 계산기를 만들면서부터였다. 4004는 4비트였기 때문에 너무나 불편했다.

결국 킬달은 인텔을 찾아갔는데 인텔의 마이크로컴퓨터 연구 부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에서는 아주 작은 공간과 인력만을 마이크로컴퓨터 부서에 제공해 주었다. 부서의 사람들과 킬달은 곧 친해졌는데 킬달은 1주일에 한번 컨설팅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인텔과 일을 같이 하기로 했다. 주당 하루의 일 때문에 킬달은 하루 종일 또는 한달 내내 거의 4004의 프로그램에 미쳐가고 있었다. 폴 앨런이 했던 작업처럼 킬달 역시 대형 컴퓨터로 시뮬레이터를 만들어 4004와 그 후속작인 8008을 위한 명령어 셋트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몇 달의 작업 후 킬달이 만들어 낸 것은 베이직이 아니라 PL/I의 마이크로컴퓨터 판인 PL/M이었다. 이 언어는 대형기기에서 수행되던 본격적인 언어였다.

인텔에서 주당 1회의 일로 들어오는 수입 말고도 킬달은 개발 장비를 얻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 인텔은 개발기인 인텔렉트 80을 업그레이드하면서 킬달에게 비디오 모니터와 고속의 종이테이프 판독기를 제공했고 킬달은 학교에 이 장비를 갖다 놓고 그의 학생들에게 마이크로컴퓨터를 가르쳤다. 킬달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이 기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저장장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아직 알테어 컴퓨터가 생기기도 전이었다. 당시의 디스크 드라이브는 500달러이고 플로피는 5달러 정도였기 때문에 종이테이프보다 쌌으며 플로피 디스크만 있다면 마이크로컴퓨터는 다른 컴퓨터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혼자 힘으로 컨트롤러를 개발하려 했으나 몇 번의 실패 후 친구인 존 토로드에게 하드웨어의 구성을 부탁했다. 이 컨트롤러는 잘 동작했다.

킬달을 기업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든 계기는 점성술을 계산하는 기계였다. 마이크로네이션이라는 회사에서 킬달에게 기계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계는 만들었지만 잘 팔리지 않았다. 대신 이 기계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의 실전 테스트를 해볼 기회를 제공했는데 킬달은 여러 달 동안 프로그램을 다시 짰고 또 짜곤 했다. 디버거 어셈블러 그리고 에디터의 일부를 만들 수 있었다. 결국 베이직 인터프리터까지 만들었으나 킬달은 그 일을 그의 학생이자 해군장교인 고든 유뱅크스(Gordon Eubanks - Symantec의 대표를 지냈다)에게 맡겨 인터프리터도 개발됐다. 이들 프로그램이 나중에 디스크를 제어하기 위한 CP/M(Control Program for Microcomputer 또는 Control Program Monitor라고도 한다)의 구성요소가 됐다.

컨트롤러까지 완성되었을 때 이들은 CP/M을 2만달러에 인텔에 팔려고 했다. 인텔은 킬달의 소프트웨어를 사주었는데 PL/M을 사고 CP/M의 판권은 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CP/M은 인텔의 개발 장비로 제공받은 인텔릭스를 많이 닮았다. 인텔은 마이크로컴퓨터를 임베디드 시장에 내놓으려 했고 CP/M은 그러한 장비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텔은 원하지 않았다. 인텔에는 인텔릭스 같은 제품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텔이 원하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킬달과 토로드는 CP/M이 하드웨어 해커들과 개발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필요한 물건임을 알고 있었다.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내인 도로시가 킬달에게 사업체를 만들자고 졸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킬달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도로시가 영업을 하기로 했다. 회사가 만들어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모든 회사들이 디스크 운영체제를 원했기 때문에 회사는 잘 운영되었다. 초기에는 라이선스를 공짜에 가까운 염가로 주기도 하다가 물건이 잘 팔리면 다음 해에는 가격이 100배 정도 올려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의 가격 모델이라는 게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IMSAI와의 비독점적인 CP/M 공급계약을 2만 5000달러에 맺은 1977년부터 킬달은 회사에만 전념했다. 비록 거의 라이선스를 도둑맞았다고 할 만큼 싼 가격이었지만 다른 회사들이 IMSAI의 관례를 따라 CP/M을 계약하기를 희망했으므로 IBM과의 거래 이전에는 중요한 경쟁자라는 것은 없었다. 회사는 급성장했다.

70년대 말이 되자 킬달은 과연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어 고민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친구에게 넘기려고 몇 번이나 주저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런 득점도 없는 게임과 업계에 대한 싫증으로 학교로 돌아가려고 몇 번이나 주저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회사를 넘겨주는 금액으로 7만달러 정도를 생각했던 킬달은 도로시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회사를 계속 유지하기로 했다. 1981년이 되자 회사의 매출액은 600만달러 정도가 되었다. 그해에 IBM과의 계약이 진행되기도 했다.

IBM PC의 운영체제 계약의 실패는 두고두고 킬달을 실의에 빠뜨렸으나 킬달은 그 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킬달은 GEM 같은 GUI 환경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최초의 CD-ROM 파일 시스템을 설계하기도 했다. 한 명이 이루어낸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하기도 했으나 사업적으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업적에 더해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과 인내심 그리고 너그러움을 언급하곤 했다.

게리 킬달의 비극 ‘상대가 빌게이츠였다는 사실’
사람들은 그의 비극이라면 바로 뒤에 쫓아오던 상대가 빌 게이츠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기가 LISP로 만든 알고리즘이 너무 아름다워 액자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라고 말하는 사람과 게이츠의 시합은 어떤 면에서는 승패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를 취재했던 포춘의 기사에서는 그를 우선 휴머니태리언으로 소개했다. 사실 빌 게이츠와 킬달은 어떤 면에서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1997 년 DDJ의 M.Swaine이 쓴 스페셜 리포트의 제목은 게리 킬달을 기억하며(In memory of Garry Killdall)였다(정말 잘 요약된 글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꽤 많을 것이다. 게리 킬달은 1992년에 사고로 사망했고 그 이전에 이미 업계의 판도는 완전히 MS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DRI의 많은 제품들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게리 킬달과 CP/M을 잊지 못한다. 필자도 게리 킬달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2008년 3월 25일

Why Does Microsoft Really Want Yahoo?

Daniel Eran Dilger

출처 : http://idreamer.org/wp/?p=494


마침내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를 인수하기 위해 446억 달러의 제안을 공개적으로 하였다. 사실 그동안 마이크로소프트는 야후 인수를 위해 비밀협상을 계속 공세적으로 해온 터였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왜그리 야후를 절실히 원하는 것일까? 야후는 어째서 즉각 인수협상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만약 인수가 이루어지면,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 그 외 기술업계는 어떻게 변할까? 역사를 보면, 정답을 알 만하다.

Why Microsoft wants Yahoo.
CEO 스티브 발머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오로지 온라인에서의 사세 확장이다. 그래야 비용과 경영 효율성을 올려서 구글과 대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야후 주주들에게 보낸 발머의 공개서한을 보면, HP와 컴팩을 합병시키려 했던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의 낙천적이기 짝이 없는, 하지만 재앙으로 끝난 계획을 방불케 한다. 발머의 서한을 인용한다.

“온라인 광고 성장세가 지속하고 있지만, 광고 전체의 규모에서 보는 이득이 매우 중대합니다. 검색 인덱스와 연구개발의 자본비용을 고려할 때, 지금이야말로 업계가 합병을 해야 할 시기입니다.” 발머는 특히 “규모의 경제가 일으키는 시너지”가 시장에서의 경쟁을 도우리라 강조하였다. 그의 말이다. “규모 면에서 경쟁자는 단 한 곳 뿐입니다.” 다름 아닌, 구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발머는 이런 말도 하였다.

“확장시킨 연구개발력이 새로운 차원의 혁신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용하는 혁신이라. 모든 것을 윈도에 묶고, 그 외 마이크로소프트의 기타 폐쇄적인 기술들을 야후의 온라인 자산과 서비스에 묶자는 의미일 것이다. 발머가 지적한 “경영 효율성” 또한 이러하다. “불필요한 경영비용과 과잉 인프라를 제거해야 합니다.” MSN에 치장을 엄청나게 해 주고, 야후의 기술에 마이크로소프트 이름표를 붙인 다음, 유닉스와 오픈소스 전문의 야후 기술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하는 동시에, 야후의 시스템을 윈도로 운영하는 핫메일 스타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최근 발머는 “비디오와 휴대폰 서비스, 전자상거래, 친목용 미디어와 플랫폼과 같은 최신 혁신을 주도할” 의도가 있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이른바 “emerging user experiences”이다. 발머는 90년대 초, “Windows Everywhere” 전략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물론 이번에는 사무실 장비와 각종 기기가 아닌 웹이다.

How Microsoft Innovates.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 서비스를 윈도 플랫폼에 묶어서, 보다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면, 이 계획은 쉽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야후 사업은 거의 FreeBSD 기반으로 구축이 되어 있따. 마이크로소프트가 왜 여기에 돈을 투자해야 할까? 마이크로소프트 플랫폼상에서 돌리기 위해 귀중한 자원을 낭비해야 하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아도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동안 “혁신적인” 온라인과 검색 사업을 구축해 보려 모든 노력을 기울여왔다. 사실 오리지날 MSN은 1995년에 만들어진 AOL 복제품이었다. 하지만 개방형 웹 서비스가 폐쇄형 온라인 서비스를 밀어내자, 이듬 해, 마이크로소프트는 재빠르게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인수하는 등, 인터넷 전략을 새로 개발한다. 그리고 이 모두를 윈도에 묶어서, 대안적인 개방형 플랫폼 개발을 막는다.

1998년, Hotmail을 인수하고, MSN 브랜드를 강조하여 여러 가지 인터넷 서비스를 개발하였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데스크톱 플랫폼 독점을 아무리 이용해도, 그로부터 10년이 되도록 온라인 사업으로 이윤을 벌어들일 수가 없었다. 웹은 콘텐트 열람별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였다. 웹사이트 가입이나 무료-기반의 서비스로도 돈을 벌어들일 수가 없었다. 온라인 자산에 투입한 마이크로소프트의 막대한 자금은 윈도 경쟁자만을 막아냈을 뿐이었다. 새로운 수입원을 발견한다거나 세우지는 못하였다.



Google Builds A Money Maker.
1996년, 스탠포드 대학 박사과정 학생이 두 명 있었다. 레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그저 어떤 단어가 있는지만 찾아내는 엔진이 아닌, 상호 정보 관련성에 기반한 검색 엔진을 디자인한다. 이 새 서비스를 공개한 연도가 1997년이었고, 구글은 재빠르게 최고의 웹 검색사이트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그러나 구글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 이런 검색 서비스로 돈을 버는 최고의 방법이 없었다. 역시 1997년에 발족한 GoTo.com이 이 분야를 개척하고 있었다. GoTo는 사용자 검색 결과를 맨 처음에 보여놓고, 그 최상단에 광고를 놓을 경우, 해당 광고주가 돈을 내도록 그 자리를 경매에 부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이 덕분에 온라인 광고 판매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GoTo를 방문하자마자 나오게 되는 GoTo의 무료 검색결과가 그리 훌륭하게 작동하지는 못하였다. 단순한 웹 콘텐트 인덱싱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구글은 GoTo의 경매 시스템을 베껴서, 여기에 구글 자신이 개선시킨 PageRank 검색을 합친다. 구글의 독특한 기여는 따로 있다. 90년대 후반에 유행한 번쩍거리고 짜증나는 배너 광고를, 사용자를 자극시키지 않는, 더 관계성이 있고 간단한 텍스트 광고로 교체한 것이다. 구글의 텍스트 광고는 실제로 검색과 관련이 있기에, 사용자들은 이들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번쩍거리고 짜증나는 배너 광고를 바로 꺼버릴 때와는 다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GoTo, Overture, Yahoo vs. Google.
2001년, GoTo는 이름을 Overture로 변경한다. 닷컴 붕괴 이후, Overture는 광고판매에 있어서 구글과의 힘겨운 경쟁을 이어나갔다. 2002년, 구글은 온라인 검색에 있어서 야후와 MSN 바로 뒤의 3위에 까지 오른다. 페이지 히트 수에서 3위를 기록한 구글은 야후와 MSN과 비교해 볼 때, 사용자가 검색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이 세 배가 더 많았다. 야후와 MSN의 히트수는 구글처럼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좋은 제품에서 나오는 히트수가 아니었다.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 모두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와 계약을 맺고, 초기 사이트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구글 사이트에서 더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사용하기 때문ㅇ니었다. 첫 선택이라서가 아니었다. 구글은 이제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간다.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엄청난 콘텐트와 광고를 자신들의 포털 사이트에 투입시켰고, 이제 야후와 MSN은 더 이상 검색엔진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Overture 또한 야후와 MSN용 광고를 제공하였기에, 구글이 유명세를 더하자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Overture는 2002년, 광고주 경매 시스템 방식의 아이디어를 구글이 베꼈다면서 구글을 상대로 소송을 벌인다. 당시 Overture는 구글의 연수입액보다 여전히 2.8배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광고 유치를 위해 구글과 경쟁을 벌이려 하던 Overture는 2003년, Gator 스파이웨어와의 제휴도 발표한다. 사용자 컴퓨터에 스파이웨어를 설치해서, 활동상황을 기록,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Overture는 또한 Gator 스파이웨어를 이용하여 팝업 광고를 띄었다. Overture가 평판 좋은 사이트라 여긴 광고주들이 돈을 내면, Gator가 띄어주는 방식이었다.

웹브라우저 창에서 팝업광고가 계속 뜨자, 소비자들은 분노하였다. 광고주들도 이를 깨닫기 시작하자, Overture의 평판은 내려앉기 시작한다. 결국 같은 해, 야후가 Overture를 인수하였는데, 야후는 3년간 Overture의 스파이웨어 계약건과 구글과의 소송도 해결해야 했다. 다음 해, 야후는 구글과 합의한다. 야후는 구글 주식 270만 주를 갖고, 그 대신 구글은 관련 특허를 영구히 라이센스하여, 구글은 앞으로 웹검색의 첫 번째 공급자로서 자유로이 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Build It And They Will Come.구글은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배하고 있던 시장에 진입하였고, 더 나은 제품을 제공하여 둘 모두를 이겨냈다. 그 결과 구글은 제일 각광받는 광고주 상대가 되었다. 구글은 웹 검색의 53% 이상을 점유하며, 2등은 야후의 19.9%이고, 3등은 마이크로소프트의 12.9%이다. 이 수치는 야후가 AT&T 인터넷 서비스에 번들되어 있으며, Live 검색 또한 윈도에 번들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 수치이다. 즉, 실제 구글의 시장점유율은 훨씬 더 높다는 의미다.

야후는 구글과 같은 기능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지만, 구글의 수입과 이윤 증가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2005년, 구글은 61억 달러의 수입과 15억 달러의 총수입을 올린 반면, 야후는 64억 달러의 수입에, 단 7억 5100만 달러의 총수입만을 올렸다. 2006년, 구글은 수입을 106억 달러로 불리고, 이윤도 30억 달러로 늘였다. 반면 야후는 69억 달러의 수입과 6억 6600만 달러의 이윤만을 올렸다. 2007년, 구글은 성장을 지속하였다. 겨울 분기 때, 구글은 연대비로 볼 때 50%의 수익 상승을, 17%의 이윤 상승을 보고하였다. 그런데 그 전망때문에 투자자들이 그리 만족해하지는 않고 있어서, 주가는 상당히 낮아졌다. 애플 역시 최고의 분기를 보고하였지만, 조심스런 전망때문에 비슷한 주가 하락을 만나야 했다.


Build It Again And They Will Not Necessarily Come.우월한 검색 결과를 통해 괴물같은 수입을 구축한 구글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똑같이 성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츄어나 공개형 비디오 콘텐트에 광고를 붙여서 수입을 창출한다는 신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구글은 YouTube를 본딴 Google Video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차라리 YouTube를 인수하는 편이 더 낫다는 교훈을 배웠을 뿐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비디오 콘텐트를 SoapBox에 묶어서 YouTube를 이기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SoapBox를 사용은 커녕, 들어보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수입으르 얻을 만한 잠재성이 있을 때, 구글과 야후, 마이크로소프트는 경매전쟁에 돌입하였다. 온라인 사용자를 모두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력은 사실, 일종의 투기였으며, 언젠가는 이윤을 내겠지라는 안일한 희망에 다름 없었다. 구글조차도 YouTube에서 아직 이윤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못내리라는 사실을 구글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구글은 검색 광고를 통해 막대한 수입과 이윤을 계속 벌어들이고 있다. 그래도 구글의 미래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을 찾아내야 한다. 처절해져만가는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서비스도 새로운 광고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입하지 않는 경우, 문제에 봉착하리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The New Search: The Old Ads.
야후는 그동안 Flickr와 del.icio.us를 인수하고, 음악사업을 시작하는 등, 웹서비스 포트폴리오를 작업해왔다. 하지만 이 서비스 어느 것도 하향세인 야후를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인기를 끌 만한 서비스를 만들려면, 유지할 수 없을 수도 있을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료 광고 유치와 텍스트 광고의 개념에서 구글이 크게 벗어나자, 검색사업은 이제 90년대 후반처럼, 사용자를 추적하는 기술로 돌아가버렸다. 지난 해, 구글은 31억 달러를 들여서 DoubleClick을 인수하려 하였다. 유료 광고 유치라는 핵심 경쟁력을 확장시켜서, 쿠키-추적이 가능한 배너광고의 옛날 세계로 돌아서는 것이다. 사용자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본 다음, 보다 관계 있는 광고를 내보내는 식이다. 구글이 텍스트 광고로 교체시켰던, 옛날의 배너광고가 이제는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구글의 텍스트 광고를 사용자들이 대거 무시할 뿐만 아니라, 그 관계성도 별로 좋지 않을 때가 많아져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는 구글의 DoubleClick 인수시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FTC)에 불만을 제기하였다. 구글이 DoubleClick을 인수한다면, 자기들은 더 이상 인수할 업체가 남아있지 않아서이다. 사실 새로운 스파이웨어 플랫폼에다가 쿠키 광고 네트워크를 접합시키기는 YouTube의 대안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대단히 어려워졌다.

Microsoft’s Last Ditch Effort to Grow.야후를 인수하면, 마이크로소프트는 크기의 측면에서 드디어 구글과 경쟁을 벌일 수 있다고 본다. 이미 온라인 시장은 성숙했다. 구글을 성공시켰던 더 나은 검색 결과라든가, 더 나은 사업방식은 더 이상 선택사양이 아니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문제점은 야후 자신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이다. 구글과 경쟁하기 위핸 야후 인수는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다이믈러-벤츠, 혹은 AOL을 인수한 타임워너, Ashton Tate를 인수한 Borland 꼴이 날 것이다. 자유낙하를 하고 있는 회사를 어째서 인수하려 할까? 이 전략이 어째서 실패할 것인지를 드러내는 사례는 매우 많다.

특히나, 야후를 인수할 경우,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나게 될 심각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두 회사의 “시너지”는 인수보다, 오히려 친화적인 제휴관계로 이룩할 수도 있다.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구글이 지원하는 개방형 채팅 프로토콜에 대항하기 위해, 양사간의 인스턴트 메신저 시스템으르 서로 연결하기로 약정을 맺었다. 또한 두 회사 모두 검색 자산에 있어서 광고 마케팅을 이미 협력할 수 있다. 아무도 그 결과대로 방문하지 않아도 말이다. 두 회사를 인위적으로 합쳐 놓은다고 가치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생산적으로 하려면, 분리된 상태로 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두 회사는 겹치는 제품이 대단히 많다. 어도비와 매크로미디아 합병 그 이상으로 많다. 게다가 규모도 각기 크기때문에 효과적으로 합칠 수가 없다. 그 기반도 대단히 다르다. 야후 메일과 인스턴트 메신저, 검색, 음악, 지도, 블로그, 비디오 등을 마이크로소프트 버전으로 교체시키거나 없애야 하며, 그게 아니면 마이크로소프트의 현재 제품과 서비스를 교체해야 한다. 야후 메일과 MSN Live/Direct/Xbox HotMail의 합병 또한 “시너지”가 아니다. 오히려 가치를 깎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게다가 야후 입장에서 사업에서 철수하기 위해, 그리고 모든 직원을 해고하기 위해 꼭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인수당해야 하지도 않다. 이와 반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MSN을 야후 서비스로 교체하는 것 또한 사용자 수를 늘리지 못할뿐더러, 온라인 서비스를 갑자기 흑자로 되돌려 놓지도 못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는 문화와 비전도 거의 공유하지 않는다. 야후는 구글처럼 되려 노력중에 있으며, PHP나 FreeBSD, YUI, Squid, 리눅스 등, 여러 가지 오픈소스 프로젝트도 지원하고 있다. 야후는 그 사업의 다양성으로 볼 때에도,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에 대해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해 왔다. 가령 최근, 야후는 오픈소스이자, 마이크로소프트 Exchange Server와 Outlook 클라이언트 이메일 소프트웨어의 대안인 Zimbra를 인수하였다.

일반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소스를 질색해 한다. 더군다나 다른 윈도 제품군을 공략하는 리눅스나 PHP, Zimbra와 같은 경우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Silverlight와 .Net, 그 외 기타 폐쇄형 솔루션을 웹상으로 발표할 의도이지만, 이 어느 것도 야후의 기존 자산에 가치를 덧붙여주지는 못하며, 오히려 사용자들을 떨어뜨리는 역할만 할 것이다.

두뇌 유출.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를 인수한다면, 시너지에 대항하는 엄청난 수의 제품과 서비스가 파괴될 뿐이다. 누가 이득을 얻을까? 구글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를 인수한다면, 그 결과는 의도적인 오픈소스 엔지니어의 퇴출일 테고, 이들은 자신의 지식을 갖고 곧바로 구글로 향할 것이다. 아니, 직원들의 자발적 퇴직을 일으킬 수도 있다.

구글이 영리한 엔지니어들을 고용하니,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엄청난 두뇌 유출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구글 역시, 역량있는 인재들을 충분히 고용하지 못할까봐 우려하는 중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에게 수 십억 달러를 지출하여, 능력 있는 인재들을 경쟁사로 쫓아내버린다?

고객 유출. 직원 유출만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새로이 윈도에 묶는 혁신을 통해, 야후의 남아 있는 제품들을 죽이려들 것이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얻기를 바랬던 사용자들을 경쟁자에게 떠넘기는 꼴이 될 만하다. Flickr 사용자들은 구글 피카사로 갈 테고, 야후 인스턴트 메신저 사용자들은 구글토크로, 야후 메일 또한 GMail로 갈 것이다. 아직도 검색용으로 야후를 쓰는 사용자가 있다면, 이들 역시 구글로 갈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검색과 온라인 기술을 사용하기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마이크로소프트를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용자들에게 있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기본 선택이기 때문이다. 윈도 사용자들 중 절대 다수는 윈도 검색 서비스보다는 구글을 사용하며, 윈도에 검색이 묶인다 하더라도 그런 상황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후에서 온다면 더 그렇다. 일부러라도 안 쓰는 곳이 야후이기 때문이다.

협력사 유출. 야후 서비스 이용에 돈을 내지도 않는 소비자들도 유출하거니와, 또 다른 유출이 있다. 현재 야후가 맺고 있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와, 애플과 같은 협력사들과의 늘어나고 있는 통합에 미칠 영향이다. 구글과 애플은 스스로도 강력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는데, 애플은 별도로 야후와도 관계를 일궈 놓았다.

어째서인가? 애플과 구글은 협력자이기도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하다. 즉, 나름의 목표에 따라 움직인다. 애플은 KHTML-기반의 사파리 브라우저(사파리는 구글 검색과 통합되어있다)를 유지하지만, 구글은 직접적으로 FireFox를 지원한다. 애플은 고유의 .Mac 서비스를 제공하여 구글과 경쟁에 임하기도 한다. 또한 애플은 고유의 스마트폰 전략을 갖고 있으며, 이 또한 구글의 안드로이드와 경쟁상대라 할 수 있다. 두 회사는 사무용 소프트웨어의 미래에 대해서도 나름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렇다고 애플과 구글이 서로 적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애플은 구글 외에도 다른 회사들과 검색 엔진 영역에서 별도의 협력 관계를 갖고 있다.

맥오에스텐에 있는 애플의 주식 위젯과, 아이폰에 있는 동일한 주식 애플릿은 모두 구글의 서비스가 아닌, 야후 파이낸스에 접속한다. 아이폰의 검색 또한 구글은 선택이지만, 야후도 선택할 수 있다. 날씨 애플릿 또한 야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애플은 아이폰의 푸시 이메일을 제공하면서 야후를 홍보하였다. 물론 애플은 맥용 오피스를 홍보하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와도 협력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Active Directory와 Exchange Server, 마이크로소프트의 폐쇄적인 OOXML 파일 포맷과의 상호연동을 위해서도 협력하는 애플이지만, 애플을 복제한 뒤, 애플을 죽이려들었던 회사와 온라인 협력을 기꺼이 맺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마이크로소프트는 퀵타임과 OpenGL, 그리고 모든 공개형 파일포맷을 죽이려 들었다. 게다가 아이폰이 비싼 사치품이라 공개적으로 폄하하였고, 오랜동안 상호운용 가능한 공개형 기술을 모조리 다 배척해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를 인수한다면, 야후의 다른 협력사들도 애플과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Microsoft’s Failing Monopoly Powers.
검색엔진 사업은 이제 성숙한 사업이다. 구글은 1등을 차지하였고, 야후와 마이크로소프트, 둘 다 지난 10년간 구글에 대해 경쟁성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즉, 구글의 자리는 위협받고 있지 않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가 합쳐지면, 더욱 강력한 경쟁자로 돌변하기보다는, 오히려 구글에 대한 기존 경쟁전략을 뒤흔들어버릴 여지가 크다.

아마도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점을 인식하는 듯 하다. 야후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다. 몰랐더라면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난 제의를 이미 받아들였을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문제점은 자신을 온라인 사업과 검색 시장에서 개선시킬, 분명한 대안을 갖고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윈도 독점의 힘은 깨지기 시작했으며, 마이크로소프트는 강력한 철퇴를 휘두르고도, 새 시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래,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적 지위란 아래의 결과를 낳았다. 소비자 시장에서 애플 맥오에스텐보다 앞선 윈도를 내지 못하였다. 대기업 시장에서 리눅스 서버의 광범위한 채택을 막지 못하였다. Media2Go와 PlaysForSure를 통해 하드웨어 업체들과 독점적인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하는 등, 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포드의 성공을 따라잡지도 못하였다. 애플 퀵타임과 아이튠스가 장악한 디지탈 다운로드 시장에서, 여러 가지 윈도미디어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축하지 못하였다. 기업시장이 RIM의 블랙베리를, 소비자 시장이 아이폰을 채택하는 데에 빈해, 윈도 스마트폰 시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소니에 비해 콘솔 판매도 떨어지고, 닌텐도에 비해 콘솔 이윤도 떨어졌다.브라우저 시장에서 파이어폭스의 부상을 막지 못하였으며, 특히 휴대폰 영역에서 사파리와 오페라의 새로운 경쟁 또한 막아내지 못하였다. 자기 제품의 채택을 강요하는 등, 독점력을 확장시키기는 커녕, 유지하지도 못하는 것이 마이크로소프트의 현실이다. 야후를 인수하여, 지금도 작동하고 있지 않은 온라인 전략을 똑같이 구사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Would Buying Yahoo Kill Microsoft?
암울한 전망은 또 있다. 야후를 446억 달러에 적대적 인수하면, 마이크로소프트가 갖고 있는 현금은 어디로 갈까? 마이크로소프트는 2007년 말, 현금과 단기자산으로 210억 달러를 갖고 있다 발표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동안 주주배당을 지불한 다음, 다시 자기 주식을 구매하게 하기 위해, 현금보유액을 갖고 주주들에게 아첨해왔다. 투자자들이 회사 자신보다 더 돈을 가져다 주리라 결정했을 때 으레 하는 일이 바로 배당과 주식 환매(buyback)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동안 미래를 찾지 못하였다. 그저 갖고 있는 현금을 날리기만 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지위를 확장시켜줄 전략적인 제품이나 회사를 인수할 수 있다면, 혹은 자기 스스로 성장동력에 새 투자를 벌이려면, 일단은 애플이 해왔던 것처럼 현금을 저축해 놓아야 한다.

그동안 애플은 온라인 서비스 사업 확장을 위해 캠퍼스를 굉장히 크게 확장시켜왔다. 뿐만 아니다. 아이포드를 WiFi 모바일 플랫폼으로, 아이폰을 전세계 스마트폰 개발 플랫폼으로, 매킨토시 시장을 새로운 방향으로, 소매스토어와 온라인 미디어 판매망 확충 등, 확장을 거듭해왔다. 애플은 또한 살 기회가 왔을 때, 혁신적인 기업이나 애플리케이션 팀을 인수하기도 하였다. 애플은 현금을 갖고 투자를 하지, 투자자들에게 돌려주지는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현재 데스크톱과 서버,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엄청난 현금을 모으고 있다. 야후를 인수한다 하더라도, 그 풍부한 소득원때문에 빚도 금방 갚을 테고, 별다른 큰 문제에 휩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엄청난 두뇌와 고객, 협력사 유출을 초래할 회사를 인수하려고, 갖고 있는 현금을 태워버리고, 미래 이윤마저 날려버리면? 그래보았자 얻는 것은 이미 문제가 있는 야후 사무실 뿐이다.

야후를 자기 회사로 편입시키려면, 적어도 5년은 들 것이다. 야후 자신도 2003년에 해 놓은 Overture와의 합병을 최근에서야 끝마쳤다. 야후와 Overture는 합리적인 합병이었다. 겹치는 부분도 적고, 비전도 비슷했으며, 제품도 보완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합병도 문제가 많았으며 정치에 휩싸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를 먹어치기가, 문제 없이 빠르게 진척을 보일 수 있을까?

앞으로 5년 뒤,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해질 것이다. 지난 5년간 마이크로소프트는 데스크톱의 명성을 맥오에스텐에게, 기업에서의 명성을 리눅스에게 빼앗겨왔다. 특히 업계 전체가 리눅스-지향적ㅇ니 전략에 줄을 선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오피스에 대한 상당한 위협도 나타났다. Lotus Symphony라는 브랜드로 IBM에게 팔린 OpenOffice가 기업시장에서, 소비자 시장에서는 애플의 iWork가 나왔다.

굳이 판매량을 좀 잃어야 늘어난 경쟁을 와닿게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 독점벽이 허물어지고나면, 소프트웨어 이윤과 판매량 구조 자체가 뒤바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수 십억 달러 어치 수입의 원천은 오피스 라이센스를 소비자에게 500달러씩, 중소기업에게 익스체인지와 서버 제품군을 15000 달러씩 팔 수 있어서이다. 79달러 짜리 소비자용 패키지와 IBM의 무료 사무용 소프트웨어(단, Lotus Notes와 리눅스 서비스에 묶여 있다)를 상대로 경쟁하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더 이상 이전처럼 현금을 빨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설사 물량으로 많이 판매한다 해도 그러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맥용 오피스의 가격을 크게 재조정하고, 훨씬 더 관대한 라이센스 계약을 맺어야 했다. iWork라는 경쟁자 때문이다.

그렇다면 5년 후인 2012년에 어떻게 될까?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입은 훨씬 적어지고 이윤도 얇아질 것이다. 그제서야 야후 온라인 서비스 합병을 슬슬 마무리할 테고, 윈도 세븐과 오피스 15를 판매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애플에서 나오는 더 나은 통합패키지와, PC용으로 무료 대안이 시장에 들어서 있는 때이다. 더 거대해진 MSN이 효과적으로 구글과 경쟁할 수 있으리라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야후의 전 직원과 전 고객, 전 협력사들이 대거 이탈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이주를 겪은 후에 덩지만 커진 MSN이 될 수도 있다.



Better Off Dead?이런 거대한 합병이야말로 세상이 필요로하는 것이리라 주장하는 회의론자도 있긴 하다. 자원의 더 나은 활용을 위해, 거대하게 비효율적인 야후를 마이크로소프트가 인수하여, 마이크로소프트의 힘을 줄일 수 있으리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합병은 한 곳에 너무 큰 힘을 몰아주리라는 위협도 가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야후 인수시도가 반독점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구글의 불만이 실제로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구글 자신이 확인해야 할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야후가 사라지고, 합병과 재구성을 통해 커진 MSN이 등장한다면, 구글 역시도 온라인 검색과 광고 외에는 신뢰할 만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다. 경쟁이 좀 완화될 5년을 구글도 누릴지 모르겠다. 아니면 오히려 이 시기를 이용하여 사업을 정리하고 더 전진함으로써, 경쟁사들이 더더욱 넘볼 수 없을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구글은 이미 광고 네트워크를 사들여 광고 가격을 내리고 있으며, 광고로 지원받는 콘텐트 사이트를 공격하는 중이다. 이대로 놓아 두면, 어느 날인가 온라인으로 광고할 만치 효율적인 곳이 구글밖에 안 남을 수도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현재 구글은 “Do No Evil”이라는 사칙(社則)으로, 미국과 중국에서 정부 압제에 대항하는 명성 또한 갖고 있다. 경쟁사가 사라져버리면, 이런 구글도 좀 바뀔 수 있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와 야후와 비교해 볼 때, 구글은 상당한 역량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를 갖고 구글을 걱정하는 것은 기우(杞憂)일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사라지고 회사들이 살찌면, 고객들을 그 만큼 덜 돌본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기술업계의 대 합병은 경쟁과 혁신에게 안 좋은 소식일 따름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마이크로소프트가 야후를 인수하면, 구글이나 다른 기술기업의 입장이 어떻게 바뀔까? 오픈소스와 혁신적인 새 제품, 온라인 광고의 경쟁에는 어떤 충격을 미치게 될련지?

마이크로소프트 야후 인수제안, 약인가 독인가?

마이크로소프트(MS)의 410억 달러 인수 제안이 야후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달갑지 않은 상대에게 지분을 매각하는 방법과 더욱 경쟁이 치열해 진 구글에 도움을 요청하는 고통스러운 방법을 두고 인터넷 개척자인 야후는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에는 지난 주 MS로부터 원하지 않은 인수 제안을 받은 것과 관련한 야후의 응답을 기다리면서 애널리스트들 사이에 최근 생긴 여론의 일치가 나타났다.

야후 이사회는 "회사가 독립을 유지 할 수 있는 다른 선택과 함께 MS의 입찰을 재고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2002년 이후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야후의 유일한 인터넷 트래픽을 대조한 표이다.


기술 투자 은행가 피터 펠베이는 "오늘 마지막으로, 야후는 MS의 제의를 거절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라고 말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애널리스트들은 만약 야후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의를 일축할 경우, 인터넷의 선구자라는 자부심을 뒤로하고 구글과 광고 파트너 쉽을 진행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야후는 각 클릭마다 수익이 되는 텍스트 기본 링크로 발생되는 총 광고 수익을 위해 구글의 다른 수 천 개의 웹 사이트에 합류하는 동안, 구글 검색을 의지할 것이다. 하지만 구글의 광고 도움을 받는 것은 야후가 고려하는 최후 수단인 MS의 제의만큼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야후는 아마도 특별 수당을 제공하거나 또는 LBO식 기업 인수에 따라 개인적으로 회사를 소유하기 위한 충분한 돈을 확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야후의 만 4천 300명의 고용인들에게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스티펠 니콜레우스 분석가인 죠지 에스쿠는 월요일(현지시각) LBO 식 기업 인수에 필요한 2천 억 달러 넘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야후는 4500명의 고용인들을 해고 하거나 혹은 인력의 31%를 감축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야후는 또한 알리바바 닷 컴과 야후 일본을 포함해, 여러 전망이 있는 인터넷 회사에 해 온 125억 달러 가치의 투자를 매각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애널리스트들과 같이, 에스쿠는 여전이 야후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중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제조업체인 MS는 다른 모든 상상할 수 있는 기업들보다 많은 돈이 있는 입찰자인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진=AP)

기사 출처 : 아이비타임즈

2008년 3월 1일

Active DeskTop Recovery script error

1. Open an explorer window.

Go to tools >
folder options >
view, and uncheck hide protected opsys files.
Apply and ok.

Then do a search in your sys drive [usually c: ] for desktop.htt.
It will be in Docs and Settings\User\Application Data\Microsoft\Internet Explorer.
Delete them [One or more].
Close the explorer window, re-click your desktop and click Refresh.


그래도 안되면 최고의 방법은 Registy 수정을 한다.

HKEY_CURRENT_USER\
Software\
Microsoft\
Internet Explorer\
Desktop\
SafeMode\
Components
Change the value of DeskHtmlVersion to zero instead of decimal 272.



IE7 이 원인이 될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