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4일

끝나지 않은 항해, 발렌베리의 150년 역사



 최근 삼성그룹이 8천억원 사회 헌납 등 이른바 ‘반삼성 분위기 대책’을 내놓으면서 스웨덴의 대재벌 발렌베리에 대한 관심이 또 한 번 커지고 있다. 발렌베리는 소유기업만으로 스웨덴 주식시장 절반을 구성할 수있을 만큼 막강한 경제적 파워를 갖고 있지만 적대감은커녕 스웨덴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존경받는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삼성공화국’ 논란이 불거진 이후, 발렌베리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에 알려진 발렌베리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발렌베리가 어떻게 기업을 일궈왔고, 어떻게 경영하는지, 또 어떻게 사회와 성공적인 관계를 맺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이에 'Economy21'은 3월초 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장승규 기자의 <발렌베리의 성공 비밀>(가제) 가운데 일부 내용을 출판사(새로운제안)의 양해를 얻어 독자들에게 먼저 소개한다. 이를 통해 존경받는 기업에 이르는 상생의 길을 함께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발렌베리는 150년 동안 스웨덴의 산업과 금융을 지배해온 유럽 최고의 재벌 가문이다. 쉽게 말해 규모와 전통에서 한발 앞서는 ‘스웨덴의 삼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발렌베리의 역사는 후발산업국 스웨덴의 발전과정과 일치한다. 스웨덴은 북극권에 속하는 척박한 토양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전 국토의 10%에 불과한 빈국이었다. 배고픔에 지친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신대륙으로 가는 이민선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1865년에서 1930년까지 무려 140만명의 스웨덴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산업화가 절실했지만 맨주먹으로 산업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은 데다 스웨덴 특유의 상황들이 한계점으로 작용했다. 먼저 스웨덴은 인구가 적은 ‘소국’(小國)이다. 이는 협소한 내수시장과 초기 자본축적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낳았다. 더욱이 19세기에는 ‘저축’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여서 산업투자에 필요한 자금 마련이 난제였는데, 발렌베리의 신화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1857년 발렌베리는 스웨덴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을 탄생시켜 국내외의 자금을 끌어모음으로써 19세기말 스웨덴 산업화의 기적을 뒷받침했다. 은행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발렌베리는 이를 기반으로 유망한 기업들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점차 강력한 산업왕국으로 변모해갔다.
대은행가가 된 퇴역 해군장교

스웨덴 남부 린쾨핑 주교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해군장교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1835년 미국 보스턴으로 향하는 넵툰호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그가 탈출구를 찾기 위해 바다로 나선 것이었다. 이때 미국으로 건너간 앙드레는 은행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엄청난 은행 위기에 처해 있었다. 횡령과 사기성 주식공모, 파산이 줄을 이었고 급기야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주는 은행업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탄탄한 은행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경제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달은 앙드레는 2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스웨덴으로 돌아와 은행에 대한 책을 구해 탐독하기 시작했다.
1856년 드디어 발렌베리 왕국의 모태가 된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엔스킬다은행)이 문을 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20년 이상 준비해온 노력의 결실이었다. 스웨덴에는 이미 적지 않은 수의 은행이 있지만 이들은 지주들의 제한적 수요나 겨우 충족시킬 수 있는 보수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어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를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앙드레는 ‘근대적 은행’을 표방하며 자금시장 거래와 채권 발행, 해외차입 등 오늘날의 은행이 취급하는 각종 업무들을 스웨덴 최초로 도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앙드레는 산업부문에 대한 대출을 강화했는데, 발렌베리 가문의 트레이드마크인 ‘산업에 대한 장기투자’가 시작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북유럽의 메디치’로 불릴 만큼 은행사업으로 큰 돈을 번 앙드레는 ‘스웨덴 제2의 군주’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영향력이 커졌다.
하지만 그의 황금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870년대 스웬덴은 유례 없는 경제호황을 누렸다. 영국과 유럽대륙의 경제 붐으로 수출품의 가격이 치솟으면서 이것이 국내 산업과 철도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자극했고, 예금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풍부한 자금을 확보한 엔스킬다은행은 철도 채권과 철강공장, 목재회사에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 결과 채권이 전체 은행자산의 40%에 육박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형적인 경기과열과 은행위기의 신호였다. 1878년 드디어 고통스런 경기하강이 찾아왔다. 수많은 대출기업이 파산위기로 내몰렸으며 자금도 순식간에 말라갔다. 스톡홀름 최대 철강회사가 지급불능을 선언하자 혼란에 빠진 고객들이 예금을 찾기 위해 창구로 몰리는 공황상태가 발생했다. 정부의 긴급융자를 받고 나서야 가까스로 파산 위기를 모면했다.
거대 산업왕국의 탄생
1964년 촬영된 발렌베리 가족사진(위) 3세데 야콥과 마크스주니어 형제(밑 왼쪽) 1952년 제지회사 파파루스 이사회(밑 오른쪽)
앙드레가 죽자 33살의 장남 크누트 아가손 발렌베리가 은행을 이어받았다. 크누트는 해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적인 은행 크레딧리요네에서 전문적인 금융교육을 받았으며, 21살 때부터 엔스킬다은행의 이사로 선임돼 은행 경영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등 은행가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크누트는 우선 금융위기로 허약해진 은행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오랜 외국생활을 통해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런던과 파리의 금융계 인물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엔스킬다은행은 이러한 크누트의 탄탄한 국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자금 중개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크누트는 190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금융시장에서 엄청난 규모의 북유럽 채권과 지방채 발행을 성공시켰으며, 이렇게 공급된 자금은 스웨덴 산업이 급격히 성장하는 핵심 원동력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엔스킬다은행에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911년 스웨덴 은행산업의 일반기업 주식 직접소유와 경영참여가 법적으로 허용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금융자본의 산업지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이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고, 주요 상장기업의 지배주주로 속속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무차별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1910~1920년대에 주식시장에 엄청난 투기 붐이 일었는데, 엔스킬다은행은 추가적인 투자를 억제하고 기존 기업의 구조조정에 주력하는 보수적인 정책으로 재빨리 전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들의 운명은 순식간에 엇갈리기 시작했다. 1920년 초반, 기업 부실을 견디지 못한 은행들이 잇따라 파산한 것이다. 하지만 엔스킬다은행만은 예외였다. 오히려 북유럽에서 가장 유동성이 풍부한 최고의 은행으로 급부상했는데, 이는 1878~1879년의 금융위기를 통해 얻은 쓰라린 교훈을 간과하지 않은 발렌베리 가문의 값진 승리였다.
1878~1879년의 금융위기는 발렌베리가 단순한 신흥 금융가문에서 벗어나 거대한 산업왕국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은행의 최고경영자가 된 크누트는 대출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부실기업들의 처리문제로 고민하던 중 법률교육을 마치고 판사 임용을 앞두고 있던 이복동생 마쿠스 발렌베리 시니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복잡한 법률문제가 얽혀 있는 부실기업 처리에는 마쿠스 같은 법률 전문가가 제격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마쿠스는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그는 우선 부실기업 중에서 성장 잠재력이 있는 업체들을 발굴하여 회생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철강회사 SKF, 발전설비회사 아세아, 트럭제조회사 스카니아 등이 잇따라 발렌베리 왕국에 편입되었으며 발렌베리의 경제적 영향력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찾아온 평화 속에서 발렌베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엔스킬다은행은 북유럽 인근 국가에 대출을 시작할 만큼 유동성이 넘쳐났으며,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수한 기업들의 경영도 본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이와 함께 발렌베리를 겨냥한 날카로운 비판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발렌베리에 대한 비판은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았다. 발렌베리는 정치 팜플렛에서 ‘마호가니 문 뒤에 숨서 스웨덴 전체를 주무르는 문어’로 묘사되곤 했다. 1934년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규정한 스웨덴판 ‘글래스-스티걸법’이 만들어지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은행 소유주식을 지주회사를 설립해 넘겨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발렌베리의 소유지배구조도 변화를 겪게 된다.
후계자의 자살과 은행 합병
세계 최대 제지 펄프업체 스토라엔소의 바이트 실루토 공장
1960년대 말 거대한 좌파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쓰는 가운데 스웨덴의 사회 분위기는 또 한 번 들끓었다. 이런 와중에 발렌베리는 다시 한 번 거센 사회적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발렌베리의 가족소유 체제가 ‘시대착오적 산물’이자 ‘혐오스런 기성권력의 상징’으로 내몰린 것이다. 때마침 발렌베리가 군 고위층에 뇌물을 제공했다는 스캔들이 터져나오자 분노한 좌파 시위대들은 엔스킬다은행을 향해 “더러운 악취가 난다”고 외쳐댔다.
이런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가문의 후계자가 자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71년 11월 스톡홀름 남쪽 숲에서 엔스킬다은행의 사장 마르크 발렌베리가 권총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마르크는 발렌베리의 3세대인 마쿠스 발렌베리 주니어의 장남으로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뉴욕과 런던, 파리, 제네바의 국제적인 금융회사에서 경력을 쌓았다. 3세대의 가장(家長)인 야콥 발렌베리가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발렌베리 왕국을 이끌어갈 다음 세대 주자는 마르크의 몫이었다.
마르크의 자살은 가문의 모태(母胎)인 엔스킬다은행의 역사적 합병을 앞두고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마르크는 합병은행의 차기 사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는 죽었고, 그를 대신해 사장직을 물려받을 발렌베리 쪽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웨덴과 세계 언론은 발렌베리 가문의 시대가 끝났다는 전망을 쏟아냈다. 발렌베리는 1995년에야 겨우 선조들의 피와 땀이 응축된 엔스킬다은행(현 SEB)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형 마르크의 죽음으로 왕국을 넘겨받게 된 피터 발렌베리는 우선 그룹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완전히 새로 짜야 했다. 소유기업들에 대한 발렌베리의 지위가 급격하게 흔들려 지분을 대폭 끌어올리지 않고는 경영권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20세기 스웨덴의 가장 위대한 기업가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의 아버지 마쿠스 주니어는 적은 지분으로도 경영권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지만 그는 달랐다. 피터는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케마 노벨, 스칸디아, 알파-라발, 사브의 자동차 부문을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하지만 자금은 여전히 부족했으며, 몇몇 기업은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의 리더
현재 발렌베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동갑내기 사촌지간인 야콥과 마쿠스다. 이들은 발렌베리의 앞선 세대들처럼 장기투자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그들만큼 인내심이 강하지 못했다. 발렌베리의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실적이 악화될 때마다 주주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고, 발렌베리는 그만큼 더 큰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야콥과 마쿠스는 발렌베리가 주주가치를 외면한 채 ‘가문의 영광’만을 추구한다는 비난 속에서도 ‘장기적인’ 주주가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발렌베리의 지난 150년의 경험이 그러한 원칙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입증해준다고 믿고 있다. 이처럼 소유기업을 장기적으로 책임지는 태도는 발렌베리가 스웨덴에서 얻고 있는 신뢰의 원천이기도 했다.
2000년대초 IT버블 붕괴로 에릭슨이 파산위기로 내몰리면서 발렌베리의 투자 포트폴리오가 집중돼 있는 지주회사 인베스터의 자산이 순식간에 반토막나기도 했다. 하지만 야콥이 인베스터의 회장에 취임해 발렌베리의 5세 경영이 본격화된 이후 인베스터의 실적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마쿠스는 2005년 9월 인베스터의 사장직으로 마감하고, SEB의 회장을 맡아 금융 분야에 전념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발렌베리의 경영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넷스케이프가 100년을 이어가기는 어렵지만 발렌베리는 문제 없다”고 공언했다. 물론 그 사이 넷스케이프는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과연 발렌베리가 그때의 공언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이제 새로운 항해에 나선 야콥과 마쿠스의 활약에 달려 있다.
장승규 기자 skjang@economy21.co.kr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21/103070.html




[글로벌명문가16] 스웨덴 157년금융名家 발렌베리가문



[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 유럽의 재계 명문가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가문이 있다. 바로 스웨덴의 유태계 발렌베리 가문이다. 영국의 유태계 로스차일드가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유명한 금융가문이다.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로스차일드가문에 대해 송곳같은 기사를 쓰지만 발렌베리가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발렌베리 가문 계보와 지배구조현황


발렌베리 가문이 유명세를 타고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여럿이다. 157년의 역사동안 사회의 지탄을 받을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특출한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 또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경영하면서 번돈으로 가문의 명예나 재력을 키우고 스웨덴 자체의 국부를 키우면서도 인류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있는 점이 다른 이유일 수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경영권을 둘러싼 골육상쟁없이 스웨덴 2위 은행인 SEB와 유럽 최대이자 세계 2위의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 장비 업체 에릭슨, 스웨덴 항공ㆍ방위산업체 사브, 중전기ㆍ산업장비 업체 ABB,광산ㆍ건설장비 아틀라스콥코 등 금융과 통신,기계와 의료,방위와 항공,건강과 IT 등 첨단 제조업 산업분야에서 19개 기업의 경영권을 직ㆍ간접으로 소유하고 있고 100여개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덕분에 연간 1200억 파운드(미화 20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2012년 기준)의 37%,상장사 시가총액의 3분의 1을 담당하며, 스웨덴 인구의 4.5%에 이르는 40여만명을 고용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25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업에만 치중하고 후손이 서로 등을 지며, 투자실패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어 비판을 받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발렌베리 가문의 역사는 1856년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웨덴에서 발렌베리라는 성이 등장한 것은 1670년생인 헤르 한손이지만 발렌베리 가문이 시조를 삼고 있는 인물은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인 오스카는 해군장교로 제대한뒤 은행업에 뛰어들어 1856년 설립한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을 설립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지난달 5일자 FT인터뷰에서 "고조부는 상선 선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항구에서 은행업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한다음 귀국해 은행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오스카는 188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 크누트가 SEB 최고경영자(CEO) 직을 승계했다. 그누트는 1907년부터 12년간 스웨덴의회 의원을 지내고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외무장관도 역임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1년 CEO직을 동생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시니어에게 넘기고 SEB 회장이 됐다

그는 1916년 스웨덴 정부가 은행의 산업자본 주식 소유를 제한하자 '인베스터(Investor)'라는 지주회사겸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기업을 산하에 편입시켰다. 자식이 없던 그는 또 본인과 아내의 이름을 딴 '크누트앤앨리스 재단'을 설립해 부가 대물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마르쿠스 회장은 설명했다.

창업 3세대는 마르쿠스 시니어의 장남 야콥이 SEB CEO를 맡고, 동생 마르쿠스 주니어가 부 CEO가 되는 투톱 경영체제를 이어갔다. 1953년 경영에 합류한 4세대는 마르쿠스 주니어의 장남 마르크가 CEO직을 1958년 물려받았다. 그의 동생 피터는 야콥이 1969년 경영권 다툼으로 물러난뒤 이사로 등재됐다가 마르크가 1971년 자살하면서 CEO로 변신했다. 

피터는 또 큰 형의 아들이자 조카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현 SEB 회장을 대표자로 내세우고, 자기 아들 야콥 발렌베리를 또 한 사람의 후계자로 삼아 5세대 투톱 경영의 원칙을 살렸다. 마르쿠스와 야콥은 동갑네기로 각각 SEBㆍ일렉트로룩스ㆍ사브의 회장과 인베스터AB의 회장을 각각 맡아 가문을 이끌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 경영자는 아무나 되지 않는다.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복무해야 하며, 해외에서 유학한뒤 글로벌 금융회사에서 일하면서 국제 감각과 인맥을 쌓아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마르쿠스 회장도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와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서 중위로 복무했다.그는 1980년 뉴욕의 시티뱅크 본사를 시작으로, 독일 도이체방크, 영국 SG워버그, 홍콩 시티그룹에서 경력을 쌓았다. 

또 발렌베리 가문은 기업 주식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주식은 '인베스터'가 갖는다. 인베스터를 다시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과 '마리앤느 앤 마르쿠스 발렌베리 재단', '마르쿠스 앤 아말리아 발렌베리 재단' 등 발렌베리 가문이 설립한 3개 재단이 소유한다. 재단 이사회에 마르쿠스와 피터 등 가문 일원이 다수 참여해 지배력을 간접 행사한다. 발렌베리 재단은 3월 말 현재 인베스터 주식의 23.3%, 의결권의 50%를 갖고 있다. 인베스터에 대한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렌베리가문은 사회환원도 많이 한다.기업들이 이익을 배당형태로 인베스터로 보내고 이 돈이 공익재단으로 흘러간다. 공익재단은 이 돈을 대학 교육이나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입한다. 마르쿠스 회장드 "발렌베리 재단은 연간 1억6000만 파운드(한화 약 2조7000억 원)을 기부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소유구조와 사회환원은 스웨덴 역사의 산물이다.발렌베리가문의 경제력 집중이 커지고, 노사분규가 극심해지자 스웨덴 정부와 스웨덴경영자연합(SAF)과, 스웨덴노동조합(LO) 등 3자는 1938년 샬트셰바덴 협약이라는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오너 일가의 차등의결권을 도입해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마르쿠스 회장은 "차등의결권은 장기투자에 대한 약속"이라고 옹호했다. 그는 "우리는 아틀라스 캡코와 1800년대부터 거래를 하고 있으며, 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펄프회사인 스토라 엔소의 이사회에 등재돼 있다"고 소개했다.

발렌베리가문은 2007년 재단자산운용회사(FAM)를 설립해 재단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FAM은 재단과 인베스터, 그룹의 투자ㆍ경영의 컨트롤타워다.FAM 이사회에도 마르쿠스 발렌베리, 야콥 발렌베리 등 발렌베리 가문의 수장이 모두 소속해 있으니 발렌베리 가문은 재단과 기업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어 보인다. 

발렌베리 가문은 집안단속도 철저하다.공익재단근무와 그룹 경영자로서 급여를 받을 뿐이어서 재산규모가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하는 세계 1000대 부자는 물론이요, 스웨덴 100대 부자 명단에 끼지도 못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가문의 철칙을 철저히 준수한다.세금을 피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로 피한 잉그바르 캄프라드에 맹공을 퍼붓는 스웨덴에서조차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의무(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다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이것이 삼성그룹이 벤치마킹하려는 이유가 아닐까?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51010500870481


삼성의 롤모델 ‘발렌베리’는?


▲ 한국을 찾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왼쪽 두 번째)이 지난 3월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photo 허영한 조선일보 기자
‘삼성의 롤모델’로 알려진 스웨덴 최대의 기업 ‘발렌베리(Wallenberg)그룹’의 총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이 유럽 비즈니스 대표단 60여명과 함께 3월 18~20일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3월 20일 기자들과 만나 “한국의 4G LTE시장과 금융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발렌베리 회장은 하루 전인 3월 19일 저녁,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삼성전자 이재용 사장과 저녁을 함께했다. 비공개 만찬이었다. 삼성 측은 “스웨덴에서 온 주요 기업 CEO들과 좋은 관계를 맺길 바라는 친선이 주 목적”이라고만 밝혔다. 재계 일각에선 이 자리를 꼭 삼성의 설명대로만 보지 않는다.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발렌베리그룹의 지배구조와 기업 운영방식 등을 삼성이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삼성은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2003년 발렌베리그룹의 경영과 지배구조를 심도 있게 살펴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2003년부터 발렌베리 벤치마킹
   
   삼성경제연구소가 발렌베리그룹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상무가 발렌베리 회장을 처음 만났을 때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삼성전자 상무였던 이재용씨와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이학수씨를 대동하고 2003년 7월 스웨덴을 방문했다. 이 회장이 ‘이례적으로’ 아들 이재용 상무와 이학수 본부장을 해외 출장에 동행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스웨덴 방문은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이 회장 일행은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을 비롯해 발렌베리그룹의 주요 임원들과 만나 새로운 경영 및 기업 지배구조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국내에는 삼성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모델이 스웨덴식 모델(Swedish Model)이란 관측과 함께, 북유럽식 경영을 조명하는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156년 전인 1856년 설립
   
   삼성이 역할 모델로 삼으며 9년간 벤치마킹해 온 발렌베리는 156년 전인 1856년 설립됐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Andre Oscar Wallenberg)가 해군 장교로 제대한 뒤 은행업에 뛰어들어 1856년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Stockholm Enskilda Bank·지금은 스칸디나비스카엔실다 은행으로 개명)을 창업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발렌베리 가문은 CEO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으로 △부모 도움 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유학을 마칠 것과 △해군 장교로 복무할 것의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발렌베리그룹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은행인 ‘SEB’, 두 개사를 주축으로 구성돼 있는데, 인베스터AB의 야코브 발렌베리 회장과 SEB의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모두 이 조건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발렌베리그룹은 창업자인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후 무려 5대에 걸쳐 경영권을 이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세습 기업이다. 연매출은 1100억달러(2010년)로 스웨덴 국내총생산(GDP·2010년 4589억달러·세계은행 기준)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고용한 종업원 수는 39만1355명(2009년 기준)으로 스웨덴 인구의 4.5%에 달한다. 스웨덴의 대표적 은행인 SEB와 일렉트로룩스, 에릭손, 사브, ABB 등 스웨덴을 대표하는 간판기업 19곳을 포함해 100여개 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한국 GDP(2010년 1조1000억달러·세계은행 기준)의 22%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5대째 세습 경영을 하고 있지만 발렌베리는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꼽힌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이런 현상의 이면엔 발렌베리의 독특한 경영 방침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룹은 매년 그룹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 사회에 환원한다. 발렌베리 재단의 수익금 역시 전액 학술지원 등 공익적 목적에 활용한다. 막대한 세금과 이익을 사회에 돌리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이른바 ‘차등의결권 제도’라는 것을 도입해 오너 일가의 주식에 일반 주식의 최대 1000배(현재는 최대 10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받고 있다. 이 가문의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사회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재단 수익금 전액 학술 등 공익 목적에 활용
   
   이 독특한 제도의 연원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심한 노사분규에 시달렸던 당시 스웨덴은 우리로 치면 전국경제인연합회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경영자연합(SAF)과, 노총에 해당하는 스웨덴노동조합(LO), 그리고 정부의 3자 간에 역사적인 ‘노·사·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이른바 살트셰바덴협약(Saltsjobaden Agreement)이다. 협상이 이뤄진 휴양지 지명을 딴 이 협약의 핵심 내용은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해 오너 일가의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고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제도는 개별 기업이 선택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을 통해 기업 경영권을 보장받는 대신, 세금을 많이 내면 된다. 이 제도는 이후 북유럽으로 확산, 2011년 현재 스웨덴 상장 기업의 55%, 핀란드 상장 회사의 36%, 덴마크 상장 주식회사의 33%가 이를 실시하고 있다. 조명진 유럽연합(EU)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은 “스웨덴의 살트셰바덴협약은 국민 화합 차원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대립적 관계를 신뢰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고, 사민당과 노조 지도자들이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산업화를 가속화했으며, 결과적으로 스웨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면서 “특히 협약에 규정한 해고 노동자의 재교육과 직장 알선을 주선하는 적극적 노무관리 정책은 스웨덴 노사 관계 안정의 주요 배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삼성 등 국내 재계 ‘차등의결권’에 관심
   
   국내 재계에서 발렌베리그룹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가 이 ‘차등의결권’이다. 소위 ‘황금주’라고도 불리는 이 제도로 인해 발렌베리 오너 일가는 지주회사의 지분을 5.3%만 갖고 있으면서도 21.5%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영국과 독일에서 “기업 인수를 위한 공정한 게임의 룰(level playing field)을 보장하기 위해 차등의결권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스웨덴 정부는 “국내 기업에 대한 외국인의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서는 이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영국과 독일의 주장을 반박했다.
   
   정부가 나서서 적대적 인수·합병 가능성을 차단할 만큼 발렌베리그룹에 대한 스웨덴 국민의 신뢰는 각별하다.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는’ 이 그룹은 여타 대기업과 달리 이윤 추구만 지향하지 않는다. 이 그룹은 금융, 통신, 기계, 의료, 방위, 항공, 건강, IT 등 오만 가지 분야에 투자하고 있지만, 이는 모두 중공업이나 첨단산업 분야에 국한된다. 유통이나 식품 등 이른바 중소기업형 사업 분야에 투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엄청난 경제 집중도를 갖고 있지만 증여·상속 과정에서 법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 이 같은 투명성은 발렌베리 집안의 가풍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창업자인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의 아들 크누트 발렌베리(Knut Agathon Wallenberg)는 스웨덴 외무장관(1914~1917)을 지냈으며, 창업자의 증손자인 라울 발렌베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2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독일 땅에서 구출하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살해돼 ‘스웨덴의 신들러’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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