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 인격이 있는 남자가 하녀에게 유혹 됐다는 걸 이해 못하겠어요."
"그게 남자의 약점이야. 높은 산을 보면 올라가고 싶고, 깊은 물을 보면 돌을 던지고 싶고, 여자를 보면 원시로 돌아가고 싶어."
하녀의 원작은 서스팬스로 가득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한밤 중 남자의 딸이 하녀를 죽일, 쥐약을 몰래 꺼내서 숨을 죽이며 주변을 둘러 보다가 순간, 베란다에서 그걸 가만히 지켜 보고 있는 하녀로 화면을 전환 했을 때 전해지는 경악처럼.
하녀는 시종일관 그런 식으로 가족들을 장악하고, 파멸시킨다. 남자와 같이 자살을 하게 되는 하녀. 감정에 충실한 순수함은 바로 거기에서 스스로를 죽일 독으로 완성 된다.
그런데 그 독을 나눠, 같이 마시게끔 하면서 상대까지 파멸시키려는 하녀를 현재의 영화에선 볼 수 없다. 영화는 알게 모르게 기득권과 부를 갖고 있는 부자 사회를 능멸하려는데 주력하기 때문이다. 원작이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면, 현재는 계층간의 마찰이다. 당연히 거기엔 부자가 아닌 계층에 대한 주관적인 시선이 다분해 지고, 그 들이 대하게 되는 부자들의 더럽고 몰상식적이며, 예의란 가식의 오만함도 벗기려 한다. 교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돈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교양 없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을 가정이란 가장 작은 사회의 단위로 비유 하는게 이 영화였다. 하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느낌 중에 쉽게 대할 수 있고, 부릴 수 있는데다, 주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는 조건에서 느껴지는 권력의 스릴과 계층적인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화두 될 수 밖에 없는 부조리가 각각 두 영화의 테마가 되어 동등한 조건하에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렇담 이 영화를 본 게 바람난 가족을 두 번 본 셈이 된 걸까?
영화가 장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려고 했고, 연출자의 의도는 블랙 코메디로 가고 싶어 했던 것도 같았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실패였다. 광고에서 표방한 서스팬스로도 가지도 않았다. 감독이 시리어스 맨을 봤더라면 많은 걸 포기하고 좀 더 자신을 색깔을 찾아 확고한 영화를 만들었을 텐데, 라고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건 이 재밌는 영화에 필요 없는 감상 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장르를 표방해도 재미없는 영화는 재미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재밌는 영화는 뭐가 됐든 두 번 봐도 재밌다. 바람난 가족이 재밌었듯이 하녀도 재밌었다.
그 재밌음은 유기적인 관계에서 연유한다. 은이는 훈과 관계를 갖고 난 후에 일을 할 때도 화장을 하고, 자신의 화장한 모습을 훈이 봐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만, 훈은 전날 관계에 대한 답으로 거액의 수표를 주고 거들떠도 안 본다. 그런 것을 지켜보는 늙은 하녀는 훈의 장모와 오래 관계한 사이로 불륜과 은이의 임신 사실도 그 늙은 하녀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그 장모는 불씨가 되어 그로 인해 해라마저 이 관계에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걸 바라보는 아이는 마지막에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은이에게 복수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용한달까, 은이에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은이가 거실의 화로에 붙힌 불마냥 타오르게 하고, 그걸 뒤로 한채 늙은 하녀에게 복수하겠다고 말하게끔도 한다. 세상에! 이런게 재밌다니. 이런게 재밌다는 거, 그걸 느끼는 당사자도 이런 구조에 수긍한다는 게 아닐까?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는 늘 이런 부조리한 모습을 고발하는데, 그것이 이젠 너무 일반적이어서 그런지 새롭지 않고, 당연히 그렇단 생각을 하게 만들고 그런 관(觀) 성립하게 한다. 그리고 새로울 게 없다는 식으로 결국 많은 이가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도를 매스미디어가 갖고 있지 않지만, 고발하려는 노력이 결국 이렇게 잘못된 세계관을 만들어 버리는 유기적 관계처럼, 아이가 은이에게 하는 말처럼, 은이가 그것으로 결심을 하고 고백한 대상인 늙은 하녀가 결국 그 집을 떠나는 결과처럼, 사실 그 늙은 하녀로 인해 모든게 시작된 이 영화의 시작처럼, 조용하게 얘기 되는 사람들의 뒷얘기는 그것이 나와 다르게 구리다고 생각되는 만큼 재밌게 되는 것이다. 그건 마치 인간의 관계가 일궈낸 병신 같은 사회가 썩어 들어가면서 맛있는 향내를 풍기는 것과 같았다.
다만 영화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훈이라는 캐릭터. 더 폭력성 짙고, 더 권위적이며, 더 노골적이길 바랬던 내 눈에 보인 저 멍청이는 애정결핍에 덜 자란 어린애 마냥 명령하고, 꿈틀거린다. 도대체 뭐가 파격이냐 라고 묻고 싶었던 영화의 불만은 바로 이 캐릭터에서 시작돼서 이 캐릭터로 끝이 날 것이다.
"그게 남자의 약점이야. 높은 산을 보면 올라가고 싶고, 깊은 물을 보면 돌을 던지고 싶고, 여자를 보면 원시로 돌아가고 싶어."
연기자는 이걸 실천하는게 어려웠던 것일까? 하녀의 원작에서 김진규가 마지막으로 하는 위의 대사는 '장난' 이라는 요소만 있는게 아니다. 감각에 충실한 본능에 살아 움직였어야 하는 어른인 남자는 어린애 마냥 웃고 화내고 귓가에 속삭인다. 캐릭터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거라면 하지 말았어야 한다. 정말 저런 캐릭터를 감독이 의도한 건지 아쉬움이 남았고, 안타까웠다. 시종일관 훈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보였던 그의 뒷모습, 탄탄한 육체 위에 입혀진 셔츠와 그 위에 입혀진 광택이 나는 베스트는, 그것만으로 권력이 줄 수 있는 공포감을 느끼게 해주었는데, 그것이 캐릭터의 연기로 전환되면 대부분 깨져갔다.
마지막. 은이가 불 타오르게 되는 장면에서, 스프링 쿨러가 작동이 되는 걸 보며 생각한다. 소소한 계층의 장렬한 죽음은 사회의 매커니즘으로 자연 소화가 되는 거라고. 전태일의 분신 자살로 사회의 큰 파장을 끼친 과거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했던, 은이의 죽음으로 집이 타오르게 될 거라는 바램은 그 스프링쿨러로 실현되지 못하고 결국 오프닝에서 떨어져 죽은 여자가 은이에겐 의미 없듯, 그 영화에 있는 아무것에도 의미를 주지 못한다. 만약 그래도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 아이가 눈을 돌리는 마지막 장면에 기대를 건다면, 생각해봐라. 그건 그냥 단지 옆을 본 것 일지도 모른다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