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많은 직장인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생겼다. 화요일과 금요일 오전 10시. 인터넷포털 다음에 웹툰 < 미생 > 의 후속편이 오르는 시간이다. 1일 평균 클릭 수 100만건에 고정 독자만 40만~50만명에 달한다. 만화 속 대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곧잘 공유된다. 먼저 본 사람이 빠져들고, 입소문도 번지면서 직장가에 커지고 있는 '미생 열풍'이다.
< 미생 > 은 프로바둑기사를 꿈꾸던 한국기원 연구생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한 뒤 대기업 종합상사에 인턴으로 입사하면서 시작한다. 서류 복사, 보고서 오타 확인, 회의 연락같이 밑바닥 잡무부터 시작한 '초짜'가 조직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을 바둑 한 수 한 수에 빗대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흑백의 돌이 부딪치고, 싸우고, 참고, 승부수·꼼수·자충수가 나오고, 마지막엔 승패가 갈리고…. 기업이라는 판 위에서 바둑돌처럼 움직이는 샐러리맨들의 삶을 세세하게 그린 이 만화는 "바로 내 이야기"라는 공감과 댓글을 낳고 있다. 한 편의 스토리 첫장마다 그려지는 바둑 한 수는 1989년 봄 응씨배 결승5국(조훈현 대 녜웨이핑) 착점들이 그대로 옮겨진다. 바둑의 변방이던 한국이 세계 정상에 처음 우뚝선 날이다. 미생(未生)이란 말도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돌(자)'을 뜻하는 바둑용어다. < 미생 > 은 현재 웹툰은 80수(회)까지, 단행본은 3권까지 나왔다. 작가 윤태호씨(43)는 < 미생 > 으로 올해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만화부문 대통령상 수상이 확정됐다. 만화가들이 최고로 손꼽는 상이다. 지난 13일 저녁 경기도 분당에 있는 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오피스텔 복층 구조의 8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윤 작가와 문하생 3명이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 직장생활과 바둑 접목 실감나게 묘사
바둑처럼 모두 자기만의 사는 방식과
살아가는 길이 있음을 말하려 했어요
1일 평균 100만 클릭, 고정 독자 50만
▲ 미대 못 간 반항심에 만화가 되려 결심
하루 한끼 라면 먹으며 만화 습작 시작
허영만·조운학 문하생 거쳐 93년 데뷔
- < 미생 > 의 인기를 예감했나요.
"전혀요. 되레 불안감을 많이 갖고 시작한 작품이에요. 3수(회) 나올 때까지 종합상사 취재가 전혀 안됐고, 과연 독자들이 바둑은 어렵다는 선입관에 갇히지 않고 만화를 즐길 수 있을까 우려했거든요. 저 스스로 맥락이 잡혔다는 감이 온 건, (장그래가 모든 게 낯설었던 출근 첫날을 밤에 복기하며 바둑판 위에 흰돌만 25개를 먼저 깔았던) 6수의 마지막 장면을 그리고 나서였어요. (스토리는) 절반 온 것이어서 계속 이 정도 반응을 이어갈 수 있을지, 또 독자 반응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 완성도를 꾀할 수 있을지 염려돼요."
-회사 생활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기업 속의 기업'이라는 종합상사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담아낼 수 있었습니까.
"준비만 3년이 걸렸어요. 바둑은 한국기원 홍보팀장의 도움을 받아 많은 바둑인들에게 조언을 들었죠. 문제는 기업 취재였어요. 대기업 상사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다 거절당했거든요. 연재 날짜는 다가오고 입술이 타들어갔죠. < 미생 > 초반부에 회사가 약간 피상적으로 다뤄져 있는 것은 소설 등에서 간접체험한 수준으로 그렸기 때문이에요. 계속 수소문하다보니 지인의 남자친구 중 무역회사에 다니는 분이 있더군요."
-그분이 '(정보를 주는) 빨대'였군요.
"그분의 후배까지 동석하는 술자리를 자주 가지면서 집중적으로 스터디했어요. 그때까지 전 회사에서 부장과 과장 중 누가 직급이 더 높은지 몰랐어요. 문외한이었죠. 회사 조직과 부서별 고유 업무 같은 기본틀부터 알고 싶었어요. 또 경우의 수나 범주도 궁금한 게 많았죠. 가령 신입사원이 부서 내 상사들을 제치고 재무팀 부장을 직접 찾아가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면,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지 묻는 거죠. 신입사원 프레젠테이션(PT) 면접시험 장면은 페이스북에서 만난 기업홍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어요. 희토류, 광자공 등 시의성 있는 내용은 신문기사, 삼성경제연구소와 무역협회 보고서 등에서 얻었고요."

"바둑과 접목해 '샐러리맨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 답을 찾는 데 오래 걸렸어요. < 용하다 용해 > < 하대리 > 같이 유머러스한 직장인 만화는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저까지 그런 유의 만화를 그리고 싶진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무수한 샐러리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을 마치 핀셋으로 끄집어내듯 보여주자고 마음먹었죠. 그들의 분주한 일상을 보여주면 자연스럽게 1%가 아닌 99% 다수의 가치가 수면 위로 발현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바둑도 그렇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삶의 방식과 길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죠."
-장그래는 고졸 출신에 2년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했지요. 인턴 마치고 입사하던 날 과장이 장그래와 동기 3명에게 검은색 넥타이와 스카프를 사주고, 서울시청 앞 쌍용자동차 분향소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오던데요. 뒤에는 노사분쟁이 많은 재능교육 빌딩도 표시하고요. 사회성이 짙은 장면이었습니다.
"주인공의 고졸 설정은 바둑 두는 사람 중에 그런 분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장그래는 만화가 끝날 때까지 계약직 신분일 거예요. 처음에 사람 소개로 인턴을 시작한 그를 정규직으로 만들면, 좋은 대학 나오고 어학연수까지 했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취업이 안된 무수한 취업준비생들의 처지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쌍용차 분향소 장면은 저의 개인적 판타지예요. 화이트칼라지만 제 만화 캐릭터들도 어차피 노동자잖아요. 항상 명퇴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넣은 장면이에요."
그는 사회문제에 관심이 높다. 전작 < 야후 > 와 < 내부자들 > 도 고발성이 짙었다. 1988년 발표한 < 야후 > 는 전두환 정권과 KAL기 추락,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까지 한국 사회의 처참한 논픽션(실제)에 작가가 창조한 수경대(하늘을 나는 경찰)라는 픽션(허구)을 얹어 주인공들의 성장과 좌절을 그렸다. 2010년부터 한 진보신문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한 < 내부자들 > 은 대선이라는 빅 이벤트를 앞두고 보수신문 논설위원, 개인의 영달만 좇는 국회의원, 재벌기업에서 뒷돈을 받고 정보를 파는 정보과 형사, 조폭 보스가 뒤엉키는 '어두운 세계'가 등장한다. 윤 작가는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후 지난 8월부터 < 내부자들 > 연재를 중단했지만 곧 재개해 대선 전까지 마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과격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비판하는 만화인데, 심정적으로 내가 공유해온 (진보)집단에서 부끄러운 문제가 일어나면서 허무감을 느꼈고, 반대집단을 향해 더 이상 활을 당길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군사정권을 경험하고, 정권이 바뀐 후에도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걸 체험한 우리 세대의 숙명 같은 것이겠죠. 또 연재만화 역시 저널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대의 일에 무심할 수 없습니다."
얘기를 뒤로 돌렸다. 그는 광주의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했다. 빚에 쫓겨 광주로 서울로 군산으로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외톨이였던 그의 유일한 친구는 그림이었다. 만화에 눈뜬 건 초등학교 때다. 만신(무녀) 할머니가 먹고살기 힘들어지자 동네에 굴러다니는 헌 만화책을 주워 와 만화방을 차렸고 그는 단골이었다. 절반은 허영만 작가의 것이었다. 새 만화가 안 들어오니 어떤 것은 쪽도 안 맞는 만화를 반복적으로 봤다. "허영만이라는 작가가 만화를 참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다.
-만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요.
"동경은 했지만 '감히 내가?'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 만화가는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라고 여겼어요. 그러다 대학 미술교육과 낙방 후 반항심에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아버지께 7개월치 학원비만 대주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서울 생활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부모님이 한 달 15만원을 보내주셨는데 학원비 8만원 내면 남는 게 얼마 없었어요. 밤이 되면 강남역 부근에 있는 만화학원에 창문으로 몰래 들어가 잤어요. 얼마 안돼 경비원에게 들켜 쫓겨난 후엔 길거리 벤치에서 잠자고 하루 한끼 라면으로 때우며 학원을 다녔죠. 그렇게 석 달을 살다가 학원이 대치동으로 이사하면서 그쪽으로 노숙도 옮겼는데 어려서부터 동경하던 허영만 선생님이 대치동 은마아파트에서 사신다는 걸 알게 됐어요."
문하생을 자청했다. 남은 자리가 없어 몇 번 퇴짜를 놓아도 계속 찾아온 그를 허영만 작가는 결국 받아줬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그는 허 작가가 특별히 아끼는 문하생이 됐다. 허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돌 하나를 그리라고 해도 돌이 있어야 할 자리를 생각하면서 그렸다"고 윤 작가를 회고했다. 2년여의 단행본 작업을 마치고 문하생 대다수를 내보낼 때 끝까지 곁에 두고자 잡았던 제자가 윤 작가였다는 것이다. 윤 작가도 "정말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데생을 직접 그리고 싶어 선생님 곁을 떠났다"고 말했다.
"선생님 출근시간인 오전 8시 전에 짐 싸서 나가려 했는데 그날따라 오전 6시 반에 선생님이 나오셨어요. 그러더니 '태호야. 라면 좀 끓여봐라' 하시는 거예요. 문 연 슈퍼마켓을 찾아내 라면을 사다 끓여드렸더니 다 드시곤 '그래, 가서 잘해라' 하시곤 자리를 비켜주셨어요. 마음이 울컥했죠."
-허 작가에게 배운 가장 큰 자산은 뭔가요.
"작가로서의 품격이죠. 선생님은 남 앞에서는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셨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항상 스스로를 연마하기 위해 책을 가까이했습니다."
-젊은 시절 겪은 감정적 혼돈과 밑바닥 경험이 만화에 투영되고 있나요.
"제 만화 등장인물들의 내레이션이나 태도에는 대부분 제 후회나 자책이 들어가 있어요. 사실은 저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도 많아요. 20대의 저는 입시에 실패한 후 좌절감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어요. 부모님을 원망하고 자해도 많이 했죠. 툭하면 사람들과 싸웠고요. 어리석게도 나를 학대하고 타인들을 공격한 거죠."
데생을 직접 하는 허 작가를 떠나 2년간 조운학 작가 밑에서 데생을 익히던 그는 1993년 < 비상착륙 > 으로 데뷔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스토리가 빈약했다. 다시 조운학 사단에 합류해 2년간 스토리 공부에 매진했다. 글쓰기가 몸에 익도록 최인호 작가의 시나리오와 송지나 작가의 대본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베껴보고, 소설 < 태백산맥 > 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 네 칸짜리 만화공간을 만들었다. 1996년 성인 코미디 만화 < 혼자 자는 남편 > < 연씨별곡 > < 춘향별곡 > 을 거쳐 1998년 1980~90년대 대한민국을 고발한 < 야후 > 로 자기 색깔이 분명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차기 작품은 뭘지 궁금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신안 앞바다 보물섬 도굴꾼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외로 사람들이 인천상륙작전이 어떤 디테일로 이뤄졌는지 모르더군요. 또 신안 앞바다 보물섬 도굴꾼 이야기는 < 미생 > 이 끝나는 대로 포털 다음에 연재할 거예요."
2시간30분간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43세의 만화가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매우 기분 좋은 것과 매우 쓰레기 같은 것을 매일 목격하면서 사는 곳?"이라고 했다. 짧은 답을 끝으로 그는 웃고 있었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2111622140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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